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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고조선 수도 '왕검성' 될 수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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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성, 고조선 수도 '왕검성' 될 수 없는 곳"

    고고학전국대회서 "오히려 요동반도에 있었을 가능성 높다"

    왼쪽부터 조양 십이대영자 비파형동검, 평양 신성동 다뉴경, 요양 탑만촌 선형동부거푸집 인물상(사진=한국고고학회 제공)

     

    그동안 정설처럼 굳어졌던, 평양성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라는 학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고학적으로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고고학회는 3일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를 열고,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을 주제로 상고사(단군 시대부터 삼한까지의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고고학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이날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과 낙랑'이란 주제를 발표한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위만조선과 (중국) 한나라의 전쟁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사기'(史記)의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주지하다시피 당시 고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었음을 알려준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적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그 위치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다. 다만 대다수 연구자들은 사서의 '열수'를 대동강으로 보고 평양설을 지지해 왔기에 그것이 정설처럼 굳어 있는 형편이다."

    정 교수는 평양성이 왕검성의 후보라는 오래된 주장을 고고학적으로 검증하면서 "평양성은 고구려에 의한 본격적인 축성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 대동강 남안에서 낙랑고분이 조성되던 시기에 매우 한정적으로 점유되거나 고분이 축조되던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이 축출된 다음에도 지역의 벽돌무덤 전통을 따르는 고분들이 일시적으로 축조됐지만, 장안성이 건설되면서는 무덤 축조마저 금지된 공간이었다고 정리된다"며 "왕검성의 진위를 염두에 둔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를 인정하지만, 지금까지 확보된 고고자료를 종합하건대 평양성은 위만조선 왕검성이 될 수 없는 공간"이라고 부연했다.

    결국 "대성산성이나 안학궁, 청암리토성 등 대동강 북안에 위치하는 그 어떤 성곽 유구 중에서도 낙랑군이나 위만조선대로 비정되는 유물의 출토 정보는 확보되지 않았다. 즉 고고학적 견지에서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은 지금으로서는 폐기해야 마땅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토성리토성(낙랑토성)은 그 출토유물로 보아 낙랑군 설치에 즈음해 축성한 성곽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일제강점기 이래로 많은 연구자들이 지지했던 대동강 이북에서 이남으로의 '이동설'은 고고학적으로 판단하건대 성립하지 않는다."

    정 교수는 "위만조선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 유역권으로 옮아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 "고조선·부여·한 종족+주변 소수집단=우리나라 원민족"

    (사진=제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자료집 갈무리)

     

    앞선 주제 발표 '고고학에서 본 민족·종족의 형성과 고조선'에서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민족의 변천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록에 등장하는 정치체의 전개과정을 살펴야 한다"며 "그들 다양한 수준의 정치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민족이나 그와 관련된 존재로 표현되는 인구집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國)이라고 칭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체로는 고조선에 이어 부여, 진국 등이 등장하고, 이들이 걸쳐 있는 공간적 범위에 그들의 문화와 주민을 계승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마한 등의 국가가 형성된다. 다시 이들이 통합 재편돼 통일신라와 발해 양국이 되고, 그 이후 고려, 더 나아가 조선 중세국가로 계승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 우리 민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구집단이 유입되거나, 역으로 우리 민족집단이 바깥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 교수는 "대체적으로 우리 민족역사상 단일국가 체제는 고려 때 비로소 정립되는 바,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국가론도 이에 비롯되는 것"이라며 "이와 맞물려 고려시대 역사서에 단군을 시조로 한 고조선 건국 신화가 기록되는데, 이는 민족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전했다.

    "족장 혹은 군장사회를 중심으로 다수 집단들이 자체적으로 정체성을 갖추고 동류의식을 갖는 인구집단을 '종족'이라고 하고, 다수의 종족으로 구성된 원민족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비로소 이뤄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그 이전 족장사회 단계에 전혀 이르지 못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후대에 지속적으로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인 것이다."

    그는 "이들 고조선, 부여, 한의 종족이 초보적이나마 동일한 원민족 의식 혹은 정체성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들 세 종족을 중심으로 다른 주변의 소수집단이 함께 어우려져 우리나라 원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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