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관련 청원이 23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청와대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검토에 착수하겠다고 밝히면서 관련 논의가 본격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낙태죄 폐지 여부를 떠나 처벌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 등에 대한 합법적인 임신 중절수술마저 거부 당하고 있는 '법과 현실의 괴리'는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성폭행 피해자에 입증책임부터 불법 임신중절 수술 요구까지직장인 A 씨는 지난해 퇴근길에서 동네주민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A 씨는 "신고하면 보복하겠다"는 가해자의 말에 신고도 못한 채 숨죽여야 했다.
그러던 사이 배가 불러왔다. A 씨는 임신 20주가 돼서야 임신 사실을 알았고, 그때서야 여성민우회 한국 성폭력 상담소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A 씨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상담소의 도움으로 뒤늦게 찾은 병원은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임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합법적 임신 중절 수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병원 측은 "우리 병원은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는 시술만 한다"며 중절수술을 거부했다. 심지어 불법이라도 수술을 하고 싶다면 "성폭력 피해사실을 신고하거나 가해 남성을 고소하지 않겠단 각서를 써야한다"고 요구했다.
병원은 시술 자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신고조차 막고 있었고, 불법시술을 하고 싶으면 270만원을 일시불로 결제할 것을 요구했다. 법적으로 임신 24주까지만 낙태가 가능한 만큼 A 씨는 결국 급한 마음에 불법 시술을 감행해야했다.
◇ 낙태죄 피하려 과도한 입증 책임 요구
(사진=자료사진)
현행법상 모자보건법 14조에 따라 성폭력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낙태가 허용됨에도 불구하고, A 씨의 경우처럼 현실에선 이마저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낙태가 죄로 규정되고 임신중절 수술이 기본적으로 불법이다 보니, 의사들도 혹시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 없이 시술을 감행했다가 의사들은 형법 270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을 받을 수 있다. 이에 의사들은 "합법인걸 피해자에게 증명하라"고 높은 수준의 증거를 피해자들에게 요구하기 십상이고, 애꿎은 피해자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이는 줄곧 임신 중절 수술이 음성화 되는 이유 중에 하나로 꼽혀오기도 했다. 노새 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성폭행에 의한 임신으로 병원을 찾았음에도 의사들이 확실한 증거를 위해 판결문까지 요구하는 사례가 상담을 통해 종종 발견되곤 한다"며 "임신은 시간이 지날 수록 위험부담이 커져 피해자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 중절 시술 등 음성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또한 중절수술 자체에 대한 의사들의 거부감에 중절수술이 음성화되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성폭력전담 의료기관에서 성폭력상담소의 상담기록만 있으면 임신 중절 수술을 해줄 수 있지만, 일선 의사들은 낙태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시술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靑 "처벌 강화 위주 낙태죄 개선 필요"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26일 청와대 홈페이지 등을 통해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청와대는 23만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서, 낙태죄로 인해 중절수술이 음성화되면서 벌어지는 문제를 인정하고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26일 청와대 홈페이지와 유튜브 등을 통해 "태아의 생명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이지만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임신중절 음성화 야기, 불법 시술 양산 및 고비용 시술비 부담 등의 부작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문제를 인정했다.
하지만 대안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여성계의 경우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의료계는 낙태죄의 폐지보단 형법과 모자보건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낙태죄가 있는 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만 죄인으로 몰리는 구조가 계속될 것"이라며 "낙태죄의 폐지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김동석 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의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을 존중하기에 중절수술의 전면 합법화를 주장할 수 없다"면서 "모자보건법에서 안전한 중절시술 양성화 방안을 절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사회적 논의와 함께, 헌법재판소는 지난 1일 이르면 내년 초 '낙태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다시 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지난 2012년 낙태죄를 합헌으로 결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