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에 파병됐던 한 참전군에게서 작전 중 적군뿐 아니라 민간인들을 사살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지난 50년간 참회하며 살아왔다는 그는 우리 정부가 이제라도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대규모 학살은 부인했다.
◇ '죽이지 않으면 당한다'는 두려움에
해병대 청룡부대(제2해병여단)가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낸 지도(사진=파월한국군전사 캡처)
베트남 중부 추라이에 주둔했던 해병대 청룡부대(제2해병여단)가 미군 비행장이 있던 다낭 방향으로 진격한 건 1967년 12월.
이 과정에서 한 보병소대는 꽝남성 호이안 주변의 한 마을을 지나게 됐다. 3개 분대로 나뉜 40여 명의 소대병력이 마을에 진입할 때 포병대대 사격지휘본부에서 정찰병으로 근무하던 A(72) 씨도 뒤따르고 있었다.
A 씨는 지난 6일, 경기도의 한 도서관에서 CBS노컷뉴스 기자를 만나 "끔찍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언제 생을 마칠지 모르니 꼭 알려야겠다"며 50년 전 기억을 전했다. 마을로 진입한 소속 부대가 일부 주민을 총살했는데 이 가운데 민간인이 섞여 있었다는 얘기였다.
A 씨에 따르면 비극은 민가로 진입하던 병사 몇몇이 난데없는 총격을 받아 숨지면서 시작됐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주민 20여 명을 마을 어귀에 모아놓고 성인 남성만 추렸다.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나 민병대 게릴라군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수색에도 물증이 될 수 있는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대장이 영어는 물론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며 용의자들을 심문했지만 소용없었다.
소대는 결국 3명을 총살했다. 증거가 없었지만 '죽이지 않으면 다음에 또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내린 결정이었다. 총탄이 코앞까지 날아드는 상황에서 '민간인을 인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헤이그 육전조약과 국제법 따위는 공허한 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A 씨는 "우리 해병이 민간인으로 알고 죽인 건 없었고 베트콩으로 오인해서 죽이는 일은 작전 때마다 있었다"며 "통계는 모르지만 그 수가 굉장히 많았다"고 밝혔다. 이어 "죄악이다.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하나 싶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후 며칠이 지나 주민들은 몰살당한 채로 발견됐다. 본부에 있던 A 씨는 "해병대가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다른 베트콩들이 와가지고 '너희들이 밀고했지?'라고 하며 주민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2년 파병이 50년을 집어삼켰다
A 씨가 수기로 써서 취재진에 보내온 A4용지 3장 분량의 편지. '먼저 베트남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내용 일부는 기사 하단에 옮겼다. (사진=김광일 기자)
A 씨는 1968년 8월 귀국했다. 23세 때였다. 잊을 만하면 악몽을 꾸는 등 현재까지도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가 깨져 무정부주의자가 됐으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귀국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얼마나 벌어왔냐는 질문은 "왜 그렇게 빈털터리냐"는 조롱과 함께 계속됐다. '생지옥'에서 받아야 했던 월급 대부분은 엉뚱한 사람이 채간 것으로 의심되지만 역시 별도리가 없다.
나라에서 나오는 월 22만 원의 돈을 움켜쥐고 자괴감에 휩싸일 뿐이다. A 씨는 "다리 아픈 사람 의족 달아주는 것만이 치유가 아니고 정신적 피해까지도 치료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우리 군인들은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죄인 된 심정으로 참회하며 살고 있다"는 A 씨를 무엇보다 괴롭힌 건 학살에 가담했다는 자책감이었다. 그는 "정부가 일찌감치 나서 잘못을 인정했다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시민사회가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데 대해, 참전군인 A 씨가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기도 하다. 그는 한국정부가 이제 명실공히 '사돈국가'로 자리 잡은 베트남에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화끈하게 배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어김없이 "베트콩 소행"이라는데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헬기 탑승을 준비중인 해병대 청룡부대(제2해병여단) 부대원들(사진=파월한국군전사 캡처)
A 씨는 다만 조직적, 대규모 학살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전쟁 당시에도 끊이지 않았던 관련 의혹들이 한국군 자체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속 부대가 호이안에 주둔했을 때도 "군복에 빨간 명찰을 단 해병대가 민간인 수십 명을 학살했다"는 보고가 본부로 들어온 적이 있다고 A 씨는 전했다. 당시 본인이 직접 사격통제시스템에 입력된 기록을 검토한 결과 한국군은 그 시각에 해당 마을에 접근하지도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다.
그는 "보병이 작전을 나가면 아군 포에 몰살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포병에 보고를 하는데 그때는 일절 기록이 없었다"고 말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던 채명신 장군의 지침을 인용하며 "군법이 엄했기 때문에 한국군이 이를 어겼을 리 없다. 베트콩 짓"이라고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이는 가해자를 한국군으로 명확히 지목하는 피해 당사자나 국내외 전문가들과 배치되는 주장이어서,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지적이 나온다.
(관련기사:CBS노컷뉴스 17.11.15 죄악, 만대(萬代)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TF 소속 임재성 변호사는 "베트콩이라 불렸던 군사세력들은 마을의 지지와 지원이 중요한 동력이었다"며 "활동의 근간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그런 작전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마을을 소개하고 구성원을 죽이는 방식으로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건 반대로 한국군의 전략과 부합했을 것"이라면서 "다만 더 이상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도록 이런 용기 있는 고백들이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A 씨가 민간인을 총살했던 마을이나, 학살 의혹을 조사했던 마을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다만 해당 지역이 꽝남성 퐁니·퐁넛이나 하미 마을 등 한국군이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곳이 아닌지는 향후 조사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A 씨가 수기로 써서 취재진에 보내온 A4용지 3장 분량의 편지 중 끝부분 발췌 |
... (전략) 해병 몇 명이 쓰러진다. 동시에 기관총 소리가 가까이서 고막을 찢는다. 불과 몇십 미터 옆 마을에서 기관총알이 계속 날아온다. 방탄복과 철모로 무장했지만 100m 이내에서는 총탄이 관통한다. 즉사다. 농가에 숨어있는 악랄한 적들은 그걸 안다. 숲속에 숨어 있으면 대포로 제거하고 들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겠지만 몇십m 민가에서 농민이 순식간에 작전개시, 베트콩들의 수법이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무작정 나가는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를 한다. 이번 마을은 주민도 적고 여러 번 수색했던 지역이다. 마을 주민들도 안면이 있다. 농사일하다가 가까이 지나칠 때 감추어둔 소형 기관총을 발사한다. 숨는 곳은 민가. 해병은 몇 명 희생당하고 나서 작전개시. 처음부터 농민을 죽일 수는 없다. 구별이 안 되므로. 양민 보호가 우선이었다.
간신히 마을을 점령하고 모든 주민을 공터에 모이게 한다. 좀 큰 작전은 월남정규군에서 파견된 통역관이 온다. 주민은 많아야 10~20명 정도. 누가 보았느냐. 총은 어디에 숨겼느냐. 베트콩들은 가장 먼저 총을 숨긴다. 자기 목숨보다 먼저. 세뇌된 주민들은 아무 말도 안 한다. 죽인다 위협해도 태연. 만약 말하면 자기 가족 모두 몰살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동자로 몇 명 추려내어 사살한다. 증거는 없다. 이에 대해서 비난한다면 그대로 받겠다. 나도 아무 말 안 하겠다.
전쟁이 이렇고 이런 것이 전투란 말인가. 저들은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철천지원수 사이도 아닌데 무슨 연유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가. 해 떨어지기 전에 부대로 돌아가야 한다. 어두어지면 적들의 세상으로 둔갑하니까.
산화한 전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대한의 해병이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훈련을 받은 사냥개였다. 사냥개는 양을 해치지 않는다. 호랑이나 사자를 물어뜯는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