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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진상 밝혀질까

사건/사고

    '제2의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진상 밝혀질까

    전두환 정권 말 이뤄진 대규모 인권유린…검찰 과거사위 '우선 조사 대상'

    (사진=자료사진)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12건을 진상 규명이 필요한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이들 사건의 면면에 관심이 몰리는 가운데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형제복지원 사건'이 눈길을 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대규모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했고 조직적인 공권력 개입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2의 삼청교육대'로 불린다.

    정권 차원에서 이뤄진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해 이번에는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지가 관심이다.

    형제복지원은 43년 전인 1975년부터 1987년까지 현재 부산 사상구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가 제정되면서 설립됐으며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서면서 상당한 수의 수용인을 대거 받아들여 관리했다.

    ◇ '부랑인 복지' 내세운 인권유린에 3만명 피해

    (사진=김용원 변호사 제공)

     

    명목은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부랑인에 대한 '복지 강화'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경찰이 실적을 목표로 노숙자나 고아 등은 물론이고 통금시간 이후에 거리를 배회하던 사람들까지 무작정 잡아다가 강제로 감금하는 일이 잦았다.

    경찰의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복지원 입원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실태점검 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복지원 홍보행사 등을 통해 종종 세간에 모습을 나타낸 입원자들은 늘 깔끔한 활동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입원자들의 삶은 "개나 소"와 다름없었다. 강제 노동은 기본이고 물론 저항하는 이에 대한 구타, 여성과 일부 남성에 대한 성폭행 등의 범죄행위도 일상이었다. 강제 입원에 저항했던 성인이나 탈출 실패자에게는 무차별 폭행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가 사망했다.

    효율적인 제압을 위해 군대와 같이 각 100명 안팎인 28개 소대를 편성해 소대장과 조장이 재량껏 구성원을 관리하도록 했다. 소수에게만 폭행 등의 권한을 용인함으로써 같은 입원자들끼리 감시하도록 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식생활도 처참했다. 도축장 폐기물에 가까운 선지를 넣은 소금국과 수확을 포기해 썩어가는 썩은 배추로 담근 김치, 상해서 삭아가는 전어로 담근 젓갈 등이 반찬으로 나왔다. 대다수가 영양실조에 걸렸고 각종 질병도 발생했지만 치료는 없었다.

    폐결핵에 걸린 입원자들은 아예 별도의 소대로 지정해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공간에 몰아넣음으로써 그저 죽을 시간만 기다리게 만들었다.

    ◇ 썩은 음식에 질병 치료도 없어 "개와 소같은" 삶

    병이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됐다. 식료품 공장에서 식품을 만들었지만 모두 외부로만 판매됐고 복지원 증축, 울주 작업장 등도 모두 강제 동원으로 진행됐다.

    죽어서도 인권은 없었다. 일부 시신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300만~500만원의 돈을 받고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1986년 12월 울주 작업장의 모습을 목격한 김용원 변호사(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 검사)가 시작한 수사 이후 1987년 1월 복지원 문서상으로 확인된 수용자는 3174명. 사망자는 무려 6분의 1에 달하는 513명이었다. 김 변호사는 당시 수용된 연인원을 감안하면 피해자 규모가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87년 복지원이 폐쇄됐지만 민주화 열풍에 전전긍긍하던 당시 정부는 피해자 지원 등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사실 은폐에 급급했다. 오히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입원자들을 일시에 다시 거리로 돌려보냄으로써 사회불안을 가중시킴으로써 부랑민에 대한 격리 논란을 부추겼다.

    김 변호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검찰 수뇌부의 반대로 울주 노역장에 대한 실태점검만 마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18대 국회의장을 지낸 박희태 당시 부산지검장이 욕설을 퍼부으며 수사진 철수를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박인근 복지원 원장에 대한 당시 정부의 호의적인 태도는 그가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여받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 대법원, 두번이나 파기환송…형제복지원 사건이 유일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김 변호사는 결국 박 원장에 대해 살인, 폭행, 성폭행 등 각종 혐의에 대해선 기소를 하지 못 한 채 국가보조금에 12억원 중 일부인 7억원에 대한 업무상 횡령과 감금죄로만 재판에 넘겼다. 1심법원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8000만원을 선고했지만 그 마저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2심법원이 징역형을 4년으로 줄였는데 대법원은 이후 두 차례나 파기환송을 하며 이를 2년6월까지 감형시켰다. 대법원이 두 번이나 무죄 파기환송한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유일하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의 이런 결정은 정권의 의지가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억원 이상을 횡령했다는 판결을 받았다면 무기징역도 가능했던 박 원장이지만 2년6개월의 교도소생활을 마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승승장구했다.

    박 원장이 출소한 후 재인수한 형제복지원은 수차례의 개명 끝에 느헤미야법인으로 변경됐다. 1000억원대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박 원장은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 회장을 지낼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2016년 6월 사망했다.

    느헤미야법인과 산하시설인 '실로암의 집'은 삼남인 박천광씨가 물려받아 운영했지만 현재는 해산됐다. 부산시가 2014년 사회복지업법에 따라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법인해산과 청산절차를 이행하도록 했으며 대법원이 부산시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박천광씨는 법인 운영과정에서 횡령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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