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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깎아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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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깎아내리나

    정부, 국제무대서조차 '노동자' 가리키는 통용어 외면…사용자 언어 고집

    지난 2012년 8월 28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서울 종로구 청계천 6가 전태일 다리로 이동해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추모하려 하자 한 쌍용자동차 노조원이 드러누워 이를 거부하고 있다. 박 후보는 당초 창신동에 있는 전태일재단을 찾아 전태일 열사를 추모할 예정이었으나 "진정성이 없다"는 유가족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200여 나라 노동자·사용자·정부 대표가 모이는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참석했던 정소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는, 총회 현장에서 우리 정부가 보인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낯선 어휘를 들으면 사람들은 제대로 못 알아듣기 마련이잖나. 국제적으로 노동자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은 '워커'(worker)로 고정돼 있는데,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굳이 '임플로이'(employee)를 고집한다."

    ◇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노동'의 진짜 얼굴을 감추다

    임플로이는 기업과 노동계약을 맺은 경우를 가리키는 한정된 표현이다. 가사노동자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를 뜻하는 워커와는 그 개념과 범위가 다르다.

    "노동자를 워커로 말해야만 '지금 노동자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라고 아는데, 임플로이라고 표현하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 정부가 전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 정 변호사의 지적이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노동자' 대신 '근로자'라는 표현을 쓴다. 이때 정부에서는 근로자를 모조리 임플로이로 번역해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ILO 총회에서는 시스템상 (청중이) 못 알아듣더라도 질문할 기회가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노동 현실을 그냥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는 셈이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모습을 두고 정 변호사는 "기만적"이라고 꼬집었다. "정확히 어떠한 범주의 노동자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게 만들어, 결국 한국의 노동 현실을 간접적으로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를 가리킬 때 워커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 정부는 유독 '국내법을 따른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를 대며 회의 참석자들이 못 알아듣는 임플로이를 쓴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한계에다, 워커라는 표준화된 표현마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의 노동 현실을 더욱 이해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정부측에서 굳이 고치지 않는 것을 보면, '여기에는 의도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며 "국내에서 노동자와 근로자를 구분해 사용하는 것처럼, 워커와 임플로이라는 표현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진단했다.

    이어 "사측이야 자기네 입장이 있으니 임플로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지만, 정부가 사측 언어를 쓰는 것은 사측 입장을 대변하는 것 밖에 안 된다"며 "결국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이라고 한 데 정치적 판단이 있었던 것처럼, 정부 당국자들이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 기념일은 '3월 10일→5월 1일'…법률 명칭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

    지난 2016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세계 노동절 대회'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절'(勞動節·May Day)이라는 명칭과 기념일이 부침을 겪어 왔다. 여기에는 '노동' '노동자'의 본래 얼굴을 감추기 급급했던 독재정권의 잔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매년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1880년대 미국에서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는 5월 1일 총파업 당시, 수많은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체포된 일을 기리는 국제 기념일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기를 강권하는 분위기다. 4·19혁명 열기를 꺾고 군부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지난 1963년 만든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직업 군인이 아니라 일반 국민이 세운 문민정부 집권 이듬해인 1994년에 해당 법률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기념일도 5월 1일이 아니라 3월 10일이었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하종강 주임교수는 "이승만 정권 당시 노동절을 3월 10일로 옮겼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명칭도 바뀌어 매년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했다"며 "1970, 80년대 열심히 싸운 덕에 기념일은 5월 1일로 바꿔냈지만, 법률상 명칭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당대 독재정권이 관련 법률을 손봐 노동을 통제하고 노동·노동자라는 말에 담긴 계급의식을 희석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노동은 '근로'로, 노동자는 '근로자'로 바뀌었다.

    하 교수는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 사회는 이북 집권당이 노동당이고 노동당 기관지 이름도 노동신문이다보니, 노동에 대해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며 "(집권 세력이) '노동자=빨갱이'라는 등식을 강요함으로써 노동이라는 말을 기피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곳 한국뿐…근로, 노동자 계급성 희석 악용"

    지난 29일 이주노동자들이 128주년 노동절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2018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결의대회를 열고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 노동권 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기 껄끄러워하는 정서를 지닌 곳은 한국 밖에 없다"며 하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근로자라는 단어는 예전부터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23번이나 나오고,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예전 노예·농도·노비·머슴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모두 근로자였던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노동자를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며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달았다. 이때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이라고 설명한다.

    하 교수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기업과 고용·피고용 계약 관계를 맺고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개념과 계층이 생겼다"며 "이를 동양권에서는 노동이라 표기했고,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부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말, 해방 공간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며 "물론 근로라는 단어도 사용됐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노동자의 계급성을 희석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근로라는 단어는 노동자 계급성을 희석시키는 표현이 아닌데, 우리 사회에서만 유독 특이하게 그러한 의미로 구분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자가 볼 때 어감상 근로자라는 표현은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계급성을 띠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다가간다. 이로 인해 노동이라는 말이 배격당해 온 것이다."

    하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식과 사회 의식을 지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 칭한다"며 "요즘에는 언론에서도 아나운서·기자들이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고 전했다.

    ◇ "사용자 언어 선택 활용으로 열악한 노동 현실 숨기려는 당국자…문제의식 無"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민주노총 전국 여성노동자대회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노동과 노동자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려는 노력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정쟁에 발목 잡혀 6월 개헌투표가 사실상 무산된 정부 개헌안에는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한다고 명시했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해 8월 취임식에서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꿔 말하면서 "앞으로 노동자라는 표현을 계속 쓰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공식 법률 용어로 사용되는 근로 표현을 모두 노동으로 대체하는 법안 12건을 지난해 8월 대표 발의했다.

    당시 박 의원은 "국제노동기구와 세계 입법례에서도 근로자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한자문화권인 중국·대만·일본 노동법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며 "노동은 동등한 위치에서의 능동적인 행위를 말하지만, 근로는 부지런하다는 뜻을 강조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사용자에게 종속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박정희 정권이 1963년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꾼 것을 두고 "노동을 이념적 언어로 불온시하고 모범 근로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용자 중심 갑질 경제체제의 폐단"이라고 꼬집었다.

    하종강 교수는 "중국·대만·일본의 노동 관련 논문에 '노동자 1000명당 노동손실일수'라는 지표가 나오는데, 우리 정부·학자는 이를 굳이 '근로자 1000명당 근로손실일수'로 번역한다"며 "제대로 공부하거나 사회 의식 있는 사람들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널리 사용하는 현실에서, 정부 개헌안에 대해 자유한국당이 '사회주의 개헌·정책 저지 투쟁본부'를 만든 것만큼이나 터무니없고 어리석다"고 꼬집었다.

    정소연 변호사는 "(앞서 언급한) 근로, 임플로이 등 표현 문제도 있지만, 노동 관련 법·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ILO 권고 등에 대해 추상적인 답변만 내놓는 것도 우리 정부의 큰 문제"라며 비판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남녀 임금 격차와 같은 한국의 여성 노동 차별 문제가 계속 지적돼 왔는데, 우리 정부는 '어린이집 지원 강화'를 답으로 내놓는 식이다. 민주노총 한상균 전 위원장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형사사건으로 구속된 사례와 관련해 '그 사건의 경과를 알려라' '재판을 재고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우리 정부는 답을 안 하고 무시한다. 그러다가 당사자들 형기가 끝나면 '확정판결이 집행됐기 때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고 대응한다."

    정 변호사는 "정부 당국자들이 먼저 문제의식을 갖기 바란다"며 "임플로이 표현의 경우도 '국내법이 근로로 표현하고 있고, 이를 영어로 옮기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정부"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노동자 편을 들어주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부 역할이 최소한 사용자의 언어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어야 하잖나"라며 "한국의 노동 현실을 외부에 정확히 알리지 않는 것, 국제무대에서조차 사용자 언어를 선택해 활용하는 것에 대해 정부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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