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vN·김영사 제공)
타인을 향한 근거 없는 혐오로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에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3'가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졌다. 현대 문명의 초석 르네상스가 꽃핀 이탈리아 피렌체를 찾아, 도시 번영 혹은 몰락의 키워드로 '포용성' '사상의 자유' 등을 꼽은 것이다. 인류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담은 석학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김영사)를 일부 인용해 그 근거를 보완한다.
지난 19일 밤 방송된 '알쓸신잡3'에서 600여년 전통의 이탈리아 와이너리를 방문했던 소설가 김영하는 "26대째 되는 후계자에게 '(와인 만드는 비법을) 아버지가 알려줬는지' 물어봤더니 '아버지도 모르고 자기도 모른다'더라"며 말을 이었다.
"기술자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 기술자들이 그러한 와인을 만들고 있고, 자기 일은 그들이 만들어 오면 맛을 판단하고, 다른 데 나가서 팔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란다. 이것은 말하자면 두오모(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를 만들 때 그 도시(피렌체)의 정치가들과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그냥 기술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와이너리 같은 데는 사기업이고, 오랫동안 내려온 가족기업인데도 그런 이야기를 너무 태연하게 해서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작가 유시민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지역의 번창 혹은 몰락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경제지리학 이론이 있다"며 해당 이론을 소개했다.
"어떤 교수가 통계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국의 도시 순위표다. 한 도시에 얼마나 많은 재능이 모여 있느냐는 지수를 정리하고 있는데, 동료 교수가 와서는 '이상하네. 비슷한 순위표를 다른 교수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슷하게) 산출한 지수는 바로 '게이 지수'다. 동성애자의 거주 비율로 도시 순위를 매겼더니 놀라운 게 거의 같았다. 두 지표가 유사하게 나온 이유를 분석해서 '3T 이론'이 나온다."
그는 "어떤 지역의 테크놀로지(1T) 지수가 높으냐 하면, 재능 있는 사람(텔런트·2T)이 많은 곳이었다. 왜 이 지역에는 텔런트가 많이 모였냐 하면, 톨러런스(포용성·3T) 때문이라는 것"이라며 "왜 게이 지수가 포용성의 지표가 되는가를 봤더니, 동성애자는 제일 마지막까지 차별받는 소수집단이라서 그 사람들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어느 동네가 우리가 살기 좋은지 정보를 끊임없이 교환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이에 김영하는 "지난 몇십 년간 그곳이 샌프란시스코였잖나"라며 "거기서 지금 IT산업들이 폭발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유시민은 "동성애자들까지도 별문제를 느끼지 않고 살 정도면 모든 유형, 모든 종류의 괴짜들이 그 지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포용성(3T)이 재능 있는 사람들(2T)을 불러모으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기술혁신(1T)이 일어난다는 가설을 만든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독일이 2차대전 끝나고 나서 미국에 과학기술 1위 자리를 단숨에 빼앗긴 것도 나치 집권 12년 동안 포용성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대인만 죽여서 없앤 게 아니고 유대인 피가 섞인 사람, 유대인 친구인 사람, 탄압을 못 견디는 사람, 동성애자가 다 미국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미국은 그걸 다 받아줬다. 그러면서 미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단숨에 1등으로 2차 세계대전 끝나자마자 뛰어올라서 그걸로 지금 60년을 먹고 살았다."
◇ "스페인 법원은 왕에게 영합하는 성향…네덜란드 법원은 정부와 별개"
(사진='알쓸신잡3' 방송 화면 갈무리)
물리학자인 경희대 김상욱 교수 역시 "17세기 네덜란드가 그랬고, 가장 잘 나가던 시기 영국 사회의 특징도 19세기에 (산업혁명으로) 굉장히 많이 발전하잖나"라며 "과학기술 분야에서 수많은 천재라고 할 만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기술자들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출신 성분이 미천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시대에 영국 사회가 굉장히 포용성이 있는, 뛰어난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라며 "이런 법칙은 상당히 많이 반복되기 때문에, 물론 입증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고 역설했다.
앞서 김 교수는 이날 방송에서 물리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말년을 종교재판에 따른 가택연금으로 보낸 사실을 설명하면서도 "사실 그(가택연금) 이후에 책을 또 한 권 쓴다"며 다시 한 번 네덜란드를 언급한다.
"'새로운 두 과학'이라는 아주 위대한 책이다. 거기에 자기가 알아낸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 쓴 것이다. 중력에 대한 이야기 같은 운동 기초법칙들을 만들었다. 그것을 출판해야 하는데, 출판할 수가 없으니까 네덜란드로 보낸다. 당시 네덜란드가 모든 자유로운 사상의 중심지였으니까. 이래서 사상의 자유가 중요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세계 제국을 지배했던 스페인을 누르고 패권을 거머쥔다. 이에 대한 설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비교적 자세히 나오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일부를 전한다.
'네덜란드는 바람이 많이 부는 늪지대로, 면적이 좁고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는 작은 지방이었다. 1568년, 주로 개신교도인 네덜란드인들은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군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란군이 무적의 풍차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는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하지만 80년이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과 그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해양 항로의 주인으로서 네덜란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한 것이다.' (450쪽)
유발 하라리는 '그 성공의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며 진단을 이어간다.
'네덜란드인들은 강력한 스페인 제국보다 더욱 쉽게 군사 원정대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급성장하는 유럽 금융제도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스페인 왕은 부주의하게도 자신에 대한 금융제도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다. 금융업자들은 네덜란드에게 군대와 선단을 갖추기에 충분한 액수를 신용으로 대출해주었다. 이 군대와 선단 덕분에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그 이익으로 대출을 갚았으며, 그 덕분에 신용도는 더 높아졌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일 뿐 아니라 대륙의 금융 메카로 급성장했다.' (450쪽)
'네덜란드인들은 정확히 어떻게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었을까? 첫째, 이들은 기일에 맞춰 전액을 반드시 갚았다. 그래서 대부업자들에게 신용을 얻었다. 둘째, 사법제도가 독립되어 있는 데다 사적 권리, 그 중에서도 사유재산권을 보호했다. 자본은 민간인들의 재산을 보호해주지 않는 독재국가에서 새어나와 법치와 사유재산권이 있는 국가로 흘러들어갔다. (중략) 스페인 법원은 왕에게 영합하는 성향이다. 판사는 왕의 입맛에 맞추려 하는 데다, 왕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 한편 네덜란드의 법원은 정부와 별개이며, 시민이나 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451~453쪽)
유시민은 이날 '알쓸신잡3' 방송 말미에 "(3T 이론은) 단순히 1980년대 이후 미국 도시들의 번영과 몰락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며 아래와 같이 강조했다.
"우리나라 5천만명 중에 20%가 서울 인구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각 지역들에 포용성이 없는 것이다. 서울도 (포용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익명성이라도 있다. 그러니까 괴짜들이 와서, 이방인들이 와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포용의 품을 넓히면 (도시의) 발전 가능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