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가 만연한 성폭력에 시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제작 단계·직군별로 다양한 위계·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성폭력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죠. CBS노컷뉴스가 영화계 성폭력 실태와 그 해법을 전합니다. [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
① 성폭력 불감증 '영화판'…여태 "발등 불만 끄자" 땜질 ② "성폭력 침묵해야 일거리"…영화인들 '주홍글씨' 공포 ③ "남자처럼 일해도 여자라 성희롱"…영화판 엇나간 '형제애' ④ 노출신마저 눈칫밥에 떠밀려…"카메라 뒤 여자 늘어야"
|
(사진=자료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더 나은 사람이기만을 기대하는 수준입니다."영화계 성폭력 불감증 현실을 단적으로 고발하는 한 관련 인사의 심경이다. 여기서 '그들'은 감독·제작자 등 영화 현장을 책임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실상은 영화진흥위원회·여성영화인모임 등에서 벌인 첫 관련 실태조사(2017년 6월 9일~9월 13일)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영화계 성폭력·성희롱 현황 파악을 위해 영화인 749명(여성 62.3%, 남성 35.6%)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가운데 46.1%가 '성폭력·성희롱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피해 경험 비율은 여성이 61.5%로 남성(17.2%)보다 압도적으로 높았고, 연령별로는 20대(45.9%)와 30대(48.3%) 젊은층에 집중됐다.
성폭력은 위계적인 권력 구조 안에 상존한다. 위 실태조사 당시 병행된 영화인들 인터뷰는 이러한 영화 현장의 경직된 조직 문화를 여설히 드러낸다.
"영화 현장에 들어가면 제 몸이 그냥 톱니바퀴가 된 느낌이에요. 정말 몸이 성하건 안 성하건 상관없이 그냥 무조건 영화가 잘 나와야 되는 거예요. (…) '지금 너 말단인데 무조건 버텨라' 이런 거예요. 그래서 특히 체력 약한 여자애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현장 나갔을 때 남자들이 거의 60%? 70%?"
이와 관련해 한 영화계 관계자는 "촬영 현장에서 제작사별로 성폭력·성희롱 예방 교육이 이뤄지기는 하지만, 그 현장 위계 구조에서 가장 위에 있는 감독이나 제작사 담당자, 주조연급 배우 등은 대개 참여하지 않는다"며 "실제 교육이 이뤄진다 해도 상대적으로 피해자 부류에 속한 사람들만 교육을 받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영화계는 여타 조직과 다른 특이점을 지녔다. 투자부터 제작, 배급 등 여러 사업 주체가 참여하는데다 제작 단계·직군·직급·고용 형태별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는 까닭이다. 이 안에서 위계 역시 복잡하게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영화 현장 위계는 일반 회사처럼 단선적이지 않고 여러 조직이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굉장히 복잡한 산업 구조"라며 "각각의 독립된 주체들 사이 이해관계가 다르다보니 성폭력 문제에도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굉장히 어렵다"고 진단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화 현장에서 성폭력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데도 이를 책임져야 하는 주체는 불분명하다.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고 보자"는 땜질식 처방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인 셈이다.
영화계·학계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영화 제작사는 보통 4년 단위로 영화 1편을 내놓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성폭력 문제를 대하지 않는다. 당장 진행하는 작품에서만 문제가 불거지지 않으면 된다는 인식 아래, 단순히 성폭력 가해자를 배제하고 재촬영하는 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는 것이다. 투자배급사 역시 감독·배우·스태프 등과 직접 계약을 맺지 않기 때문에 책임에서 멀어져 있다.
전국영화산업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제작사·투자배급사 등 단위 주체들이 성폭력·성희롱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해법을 찾기 위한 공동의 목소리를 내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며 "만약 투자사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지 않거나 감독 등에게 그러한 사실을 주지하지 않는 영화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성폭력 예방이) 가능하겠지만, 관행적으로 그러한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수많은 사람들 목숨줄' 인식…남녀 역할 고정관념도 큰 영향
지난달 6일 서울 동교동 청년문화공간 주에서 남배우A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더 나은 영화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촬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배우 반민정이 참석해 입장을 밝힌 뒤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당장 영화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감독·제작자 등의 성폭력 인식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선결 과제로 꼽힌다.
지난 2016년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어 올해 미투 운동 국면을 지나면서 영화계 안에는 크게 두 가지 기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그동안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이니 변해야 한다"는 인식이고, 나머지는 "이젠 노출신 못 찍는 거냐" "그러다가 미투 당한다"는 곡해다.
그간 영화 현장에서 노출신 촬영의 경우 대부분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단지 노출이 있는 장면이라는 전제만 내세운 채 구체적인 설명이나 상호간 동의 없이 "자유롭게 해보라"는 식이었다. 배우 계약서에도 '노출 장면이 있다'는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안병호 위원장은 "노출신 계획을 세부적으로 짜더라도 막연하게 '현장에서 더 나은 장면이 나올 수 있다'고 여기니 배우들과 마찰을 겪기 십상이고 촬영 지연으로 피로도가 쌓인 스태프들은 '빨리 끝내야 다음 일을 진행하는데'라는 불만이 쌓이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특히 여배우들은 떠밀리듯이 '현장 인원을 최소화해 달라'고 마지막에 합의하게 되는 식"이라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 실태조사 당시 인터뷰에서도 한 여성 배우는 "내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인데 이것을 문제제기했을 때 대중들이 다 알게 되잖나. 그 다음부터는 이 판에 더 이상 발을 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제작자들의 경우 대부분 남자들인데 '쟤 되게 까다로운 애야' '쟤는 우리 요구를 잘 안 들어주는 애야' '쟤 성격 별로 안 좋아'라고 소문 내기 시작하면 (문제제기한) 그 사람하고는 누구든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그런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절대로 얘기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나영 교수는 "거대하고 복잡한 산업 구조인 영화 현장에서 배우나 스태프가 성폭력·성희롱으로 불편한 심경을 느꼈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줄이 걸려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기 굉장히 어렵다"며 "각자가 '이 판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데다, 더욱이 많은 이들의 고용 형태가 비정규직이다보니 문제제기를 할 경우 그 다음 일거리가 끊기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했다.
영화계 종사자들의 전통적인 성별 고정관념이 비교적 강하다는 점 역시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남녀간 사회적 지위 차이를 '능력' '신체적 특성'과 연관짓는 데 따른 인식이다.
위 실태조사를 보면 '성 고정관념'을 묻는 설문에서 응답자 동의 비율이 높은 항목은 '남녀간 사회적 지위 차이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결과'(27.8%), '신체적 위험 부담이 큰 일은 남성이 해야 함'(25.3%)으로 5점 만점(매우 그렇다)에 각각 2.59점, 2.69점으로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직군별 성 고정관념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비 불균형이 뚜렷한 응답자 직군인 '배우'(여성 83.8%, 남성 16.2%), '촬영·조명·동시녹음'(여성 17%, 남성 83%), '미술·소품·분장·헤어·의상'(여성 86%, 남성 14%)에서 각각 2.28점, 2.21점, 2.21점 순으로 상대적으로 강한 성 고정관념을 나타냈다.
이 교수는 "영화 현장에서 여성이 많은 직군, 예를 들어 분장·헤어·의상 등에서 오히려 성희롱·성폭력 인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며 분석을 이어갔다.
"의식은 관계를 통해 자기 경험을 들여다보면서 성장한다. 올해 미투 운동을 통해 시민들 성평등 의식, 성인지 감수성이 많이 성장한 것은 그 좋은 예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 국면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갈등을 통해 문제의식을 학습하고 해결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계 내부적으로도 그러한 학습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교육과 자정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