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은 선량한 시민들을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체제 선전·유지를 위해 누구든 '간첩'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던 시대였다. 바다에서 조업하던 어부들은 그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강원영동CBS는 간첩 조작사건으로 지금까지도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한단계 도약하고 있는 남북관계 시대에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개보다도 못한 인간 취급"…아물지 않는 '그날'의 기억 ② 간첩 자식 '낙인'으로 짓이겨진 세월… 고통 '대물림' ③ 청산하지 못한 과거…화해 분위기에만 취해있을 건가 (끝) |
속초, 고성, 양양지역에서 발생한 간첩사건을 다룬 기사로, 1969년 2월 25일자 경향신문 보도. (사진=속초문화원 제공)
한반도 평화시대를 대비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분주한 나날이지만 청산하지 못한 납북어부 문제는 여전히 목구멍에 걸린 가시다.
◇ 보호받지 못한 어로활동…간첩으로 내몰린 어부들납북어부 피랍사건은 남북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속초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어선 피랍은 남북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65년 이후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고조에 달한 때는 1967년과 1968년으로, 당시는 체제 선전 등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다.
그럼에도 월선조업이 이뤄지고 북한에 납치되는 일이 반복된 이유는 어로저지선이 한 달 사이로 계속 변경된 탓이다. 길면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하는 어부들은 당연히 정보취득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또 월선하지 않고 우리 해역에서 조업하던 중 북한에 납치되기도 했는데, 납북어부 피해자들은 어로 보호 활동을 담당하던 해양경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의도하지 않은 월선이었지만, '반공을 제1 국시'로 삼았던 냉전시대는 어부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부들은 남한으로 귀환해 '간첩' 올가미에 씌워져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 고통은 가족에게 '대물림' 됐다.
간첩으로 조작돼 72일 동안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에게 잔혹한 고문을 받은 김성학(69)씨가 납북어부 간첩 사건 최초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진=김성학씨 제공)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10년 과거사 조사결과를 정리하며, '납북 귀환어부의 정부정책'에 대해 "당시 남한 정부는 국가보안법상 왕래죄(1959년) 등을 적용하며 처벌을 강화하는 대책만 쏟아냈고 사실상 어선을 보호하는 것에 소홀했다"고 평가했다.
즉,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정작 힘없고 가난한 어부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지적이다.
반면 남북관계 긴장이 완화한 2000년대 들어서는 납북사건이 크게 줄었고 어선들도 대부분 짧은 기간 내에 남한으로 귀환했다. 귀환한 어부들이 간첩혐의에 내몰리는 일도 없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06년 12월 월선한 우진호의 경우 북한은 18일 만에 선박과 어부 2명을 송환 처리했다. 우리 정부도 의도적인 월북이 아니라고 판단, 당사자를 구속 처벌하지 않았다.
◇ 멈춰선 과거사 조사위원회 활동…청산 속도 '더뎌'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김춘삼(64)씨는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도움으로 진실규명이 이뤄져 재심 신청 끝에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사진=유선희 기자)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은 힘겨웠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씩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과거사 정리는 답답하리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정리를 위해 지난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진실화해위원회는 4년여의 활동을 끝으로 해산했다. 더 큰 문제는 진실규명 신청기간을 1년으로 정해놓은 탓에 관련 사실을 모르고 있던 상당수 어부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청기간 제한과 짧은 조사활동은 납북어부의 실상을 제대로 밝혀내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진선미 의원과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 등은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을 재개하고, 조사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비슷한 법률만 7건이지만,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80년대 이뤄졌던 간첩조작사건 관련자 등에 대한 서훈 취소 현황으로, 행정안전부가 지난 2018년 7월 10일 발표했다. (사진제공=행정안전부 자료)
한편 죄 없는 어부들을 간첩혐의로 조작해 고문한 수사관들에게 수여한 '잘못된' 보국 훈·포장은 완전히 회수되지 않고 있다.
상훈 관련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지난 2016년부터 '거짓 공적' 수훈자를 파악하고 문제가 있으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이행해 왔다. 행안부에 따르면 60~80년대 간첩조작 사건으로 서훈이 취소된 수사관은 올해 7월을 기준으로 모두 53명이다.
하지만 행안부의 조치가 여전히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훈 취소에 대한 법령 해석을 좁게 하는 탓이다.
행안부가 지금까지 간첩조작 의혹 사건으로 서훈을 취소한 이들은 모두 재판에서 피해자가 무죄로 밝혀진 경우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꼭 무죄로 판결받지 않았어도 당시 불법 연행이나 고문이 자행됐다는 기록이 있다면, 이 역시 '거짓 공적'에 해당하는 만큼 서훈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에서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납북 귀환어부의 간첩조작 사건이 무죄로 판결 났음에도 서훈이 취소되지 않은 담당 수사관은 모두 12명이다.
◇ 남북미 회담 등 새로운 평화시대, 다시 묻는 '국가 역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나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남북관계가 개선되며 '새로운 평화시대'를 꿈꾸는 요즘이지만,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면서 피해 당사자들과 시민단체는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변상철 사무국장은 "납북어부 사건은 체제 우월성이나 안보의식을 강화하는 일에 어부를 이용한 정말 죄질이 나쁜 사건"이라며 "지금이라도 납북 귀한어부들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서 일괄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통일이 됐을 때 양국이 치뤄야 하는 비용과 사회 혼란이 클 수밖에 없다"며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한 이후에야 비로소 '어떤 국가, 어떤 통일 국가'를 만들어나갈지 그려 볼 수 있고, 이 과정은 통일 한반도로 나아가는 시험적인 기구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속초향토문화원 엄경선 연구위원은 "남북이 화해와 평화로 가고 있는 시점에서 국가는, 분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권유린 등 잘못에 대해 제대로 진실규명하고 명예회복 등 후속조치를 해나가야 한다"며 "이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에서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러한 작업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묻는 문제"라며 "납북어부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들여다 보고 정리하는 작업은 상시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