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당시 '푸른 거탑'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뒤 자대배치를 받고서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이었던 필자는 헌법이 보장한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했다. 당시 부대장은 부대원 한 명, 한 명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면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부대원에게 근엄하게 깔린 목소리로 감히 거부할 수 없는 훈시, 아니 지시를 내렸다.
"붓뚜껑 하나 통일시키지 못하는 부대장은 부대장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는 '현타', 즉 현실 자각타임이 왔다. "아,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런 거... 그리고 나는 까라면 까야하는 쫄따구...". 이런 유능한 지휘관들 덕분에 육사출신 군바리들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 순조롭게 바통터치를 이어갔다.
당시를 살았던 지금의 꼰대들에게 이런 '웃픈' 현실은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상식'으로 통용되던 시대였다. 당시에 그들은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레토릭을 참칭했다. 도대체 그 보통사람은 누구였고, 뭐가 위대했을까?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한참이 지난 30여 년이 흐른 뒤에서야, 뭐 문제될 것이 없는 시점에 이렇게 필자처럼 비겁하고 빛바랜 양심고백을 하는 사람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도 많다.
1990년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절에 윤석양 씨는 당시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내용을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그뿐인가? 1992년 3월 ROTC 출신 중위로 복무하던 이지문 씨는 양심선언을 통해 당시 총선 과정에서의 필자가 겪은 것과 똑같은 '붓뚜껑 통일' 비리를 폭로했다. 군대 내에서 진행되는 부재자투표에 민주자유당(당시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상관이 병사들에게 요구하고 공개투표 행위가 있었다는 부정 선거를 공선협(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고발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했던가? 이처럼 뜻있는 사람들의 결기와 용기가 시대를 흐르면서 쌓이고 쌓여 민주주의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아직 완전체와는 거리가 있다지만, 적어도 인터넷 댓글이나 언론 할 것 없이 공론화 장에서조차 대통령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과거 '남산'이니 '남영동 대공분실'이니 하는 단어를 의식하며 쭈뼛거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21대 총선 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 유권자는 지난 20대에 비해 200여만 명이 늘면서 4.5%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 여기에는 '19禁'의 벽을 뚫고 데뷔전을 치르는 만 18세의 '정치무대 루키'가 55만여 명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유권자 수의 1.2%에 불과하지만, 향후 정치무대는 내일 '한 표 행사'로 첫발을 내딛는 이들의 것이 될 것이다.
이들 1.2%에 고한다. 부디 "요즘 젊은 것들, 정치가 뭔지 알기나 할까" 운운하는 꼰대들의 우려를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멋진 데뷔전의 주역들이 되어 달라고. '열정페이, 비정규직, 노오력' 등등이 읊어지는 그늘진 현실이 자리해 있다지만, 적어도 필자와 같이 한참이나 늦게서야 '비겁한 양심고백'을 하게 될 상황은 없지 않은가!
故 함석헌 선생께서는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 해 먹는다"고 목청을 돋웠다. 또 미국의 한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투표하지 않는 자, 불평할 권리도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