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안나경 기자)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약 1년간의 논의 끝에 18일 '디지털 성범죄군'(가칭) 양형기준을 의결할 예정이었지만 잠정 연기가 불가피하게 됐다. 소위 'n번방 방지법'들이 잇따라 국회를 통과하면서 형량이 상향되거나 새 범죄군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판결 선례가 없는 신설된 죄목에 대해 양형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도 맞물리면서 양형위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18일 오후 4시부터 양형위원회 제102차 회의를 연다고 17일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는 소위 '디지털 성범죄'군의 명칭과 양형기준안이 처음으로 의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19개와 형법 개정안 8개 등 성범죄 관련 법안들이 대거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현재 양형기준 초안의 재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양형위에서 의결 예정이었던 디지털 성범죄군의 대상은 성폭력처벌법 제13조 통신매체이용음란죄와 제14조 카메라등이용촬영죄,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제11조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관련 범죄 등 3가지 유형이었다.
그러나 20대 국회 막바지 법안 통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반포했을 때 형량이 기존 '5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형'에서 '7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 벌금형'으로 상향됐다.
(그래픽=안나경 기자)
성착취물을 영리 목적으로 유포한 경우에도 기존 '7년 이하 징역형'에서 '3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법정형 상단을 없애 처벌이 강화된 상황이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른 불법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이 신설되기도 했다. 기존에 소지·구입 등의 범죄는 아동·청소년이 불법촬영 대상일 때만 처벌했던 것에서 성인 피해자에 대해서도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를 신설해 이른바 '딥페이크' 영상물 등 편집·합성을 통한 허위영상물에 대한 처벌 조항도 마련했다. 오는 20일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n번방 재발 방지법'이 추가로 통과될 가능성도 있다. 디지털 성범죄 공소시효 연장과 통신사업자에 대한 불법촬영물 삭제·접속차단 의무 부과 등의 내용이 골자다.
이에 기존 법정형과 죄목들을 대상으로 초안을 만들었던 양형기준을 대대적으로 손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양형위 논의에서 카메라등이용촬영죄의 기본 형량 범위는 6개월에서 1년6개월로 제시됐다. 아동·청소년음란물 제작죄의 경우 기본형량이 4~8년이 적정하다는 데 다수의견이 모였다.
초안에서 제시한 기본형량에 대해서도 법정형에 비해 낮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법정형 자체가 더 올라간 셈이다.
디지털 성범죄군의 양형기준을 정하면서 새로 도입된 딥페이크 영상물, 불법촬영 소지 등의 범죄들을 포함할 것인지를 두고도 논쟁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유의미한 양형통계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범죄 발생빈도와 재판 실무 사례가 많은 범죄들을 대상으로 양형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양형위원회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선례가 아예 없는 신설 죄목에 대해 양형위원회가 형량범위부터 정하는 것은 일종의 '입법' 작용이 될 수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서 처벌 선례가 매우 적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에 대해서도 양형기준을 설정키로 했던 만큼, 강화된 개정법에 대한 양형기준 설정 요구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성폭력 단체의 한 활동가는 "성착취물 제작의 법정형은 높은 편이지만 지금까지 판례에서 징역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며 "새로 도입된 죄목들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