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인근에 주민들이 아이를 애도하기 위한 추모공간이 만들어져있다. 지난 3일 베이비박스 인근 드럼통에서 수건에 싸여 있는 영아의 시신이 발견됐다.(사진=이한형 기자)
최근 베이비박스 앞에서 신생아가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이 같은 영아 유기를 막기 위해서는 '비밀출산제'(보호출산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행법상 부모 신분을 기재해야만 출생 신고 등 입양 절차가 이뤄질 수 있는데, 이를 원치 않는 부모들이 영아를 유기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아이 키울 여건이 되는 부모에게도 입양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가명으로 출생 신고가 가능해지면 부모가 아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기만 매년 200명 이상…"비밀출산제 필요"
5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인근에 주민들이 아이를 애도하기 위한 추모공간이 만들어져있다. 지난 3일 베이비박스 인근에서 수건에 싸여 있는 영아의 시신이 발견됐다.(사진=이한형 기자)
지난 3일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가 운영하는 베이비박스 앞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인근 CCTV 등을 추적해 사망한 영아의 생모 A씨를 거주지에서 붙잡았다. A씨는 전날 밤 늦게 베이비박스 맞은편 드럼통 위에 남아를 두고 간 것으로 확인됐다.
영아유기는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영아유기는 1272건이 발생했다. 한 해 평균 127건으로, 사흘에 한 번 꼴로 영아유기가 일어나는 셈이다.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놓고 가는 등 경찰청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것까지 합하면 수는 더욱 늘어난다.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200명 이상의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들어왔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후인 지난해에는 170명 수준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영아유기를 막기 위해 '비밀출산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밀출산제란 산모가 익명으로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는 제도다. 현재는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서는 2012년 개정된 '입양특례법'에 따라 반드시 출생 신고를 먼저 거쳐야만 한다.
이때 아이 출생 신고를 하려면 '가족관계등록법'에 의해 부모 신원을 의무적으로 적어야 한다. 이로 인해 출산 사실을 숨기고 싶은 미혼모 등이 입양을 포기하고 결국 영아 유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입양 시 아이의 출생신고를 의무화한 2012년 이후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기의 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2010년 4명, 2011년 35명, 2012년 79명 수준이었다가 2013년 252건으로 3배 이상 증가했고, 이후 매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됐다.
반면 입양된 아이 수는 확 줄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2464건이었던 입양은 2012년 1880건으로 줄더니, 이듬해 922건으로 감소했다. 2018년에는 681건을 기록했다.
지난달에는 한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에 '아이 입양합니다. 36주 되어있어요'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글쓴이는 미혼모센터에서 아기를 입양 보내는 절차 상담을 받다가 화가 나 글을 올렸다고 진술했다.
전국입양가족연대 김지영 국장은 "출생아 1만명 중 유기되는 영아 숫자는 2012년 4.8명에서 2018년 9.8명으로 급증했다"며 "현행 입양특례법의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선 비밀출산제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아 유기는 아무리 복지가 좋아지고 국가적 시스템이 촘촘해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를 피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입양 조장한다"는 지적에…"정부가 출산부터 태아 생명까지 책임지는 것"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비밀출산제 도입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아이의 친부모 알 권리를 담보하지 못한다'와 '입양을 조장한다'는 반대 논리에 부딪혀 시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난 20대 국회 때는 미래통합당 오신환 전 의원이 '임산부 지원확대와 비밀출산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공청회까지 열렸지만 논의가 이어지지 못하다가 결국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당시 '부모의 결정에 따라 친자관계의 단절이 인정되고 친부모 등 출생정보에 접근할 자녀의 알 권리가 침해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별법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출산지원시설' 등을 신설해 부모가 가명으로 출생신고하는 것을 도움과 동시에 실제 신상정보를 밀봉 보관했다가 추후 자녀의 신청 등을 통해 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아이의 알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신상 공개를 원하지 않는 친부모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프랑스·체코 등에서도 부모와 아이의 권리를 조화시킨 비밀출산제도가 도입돼 시행 중이다. 체코의 경우 비밀출산을 원하는 산모는 신상정보 제공 없이 출산이 가능하다. 이후 산모에게 가명 등이 제공돼 출생 등록 서류를 작성하게 하고, 실제 산모의 신상정보는 밀봉돼 오직 법원 판결에 의해서만 개봉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독일은 자녀가 16세가 지나면 친모의 신원을 조회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비밀출산제가 아이를 쉽게 포기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부모가 가명으로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면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덜해져 쉽게 입양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2012년 입양특례법 개정 배경에는 쉬운 입양 절차로 인해 영아 매매 등 여러 부작용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비밀출산제에 대한 오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오 의원과 함께 입법 운동을 해 온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비밀출산법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랑출산법'으로 바꿔 부르려고 한다"며 "이 법의 본질은 태아의 생명을 지키고 출산부터 양육까지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5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인근에 주민들이 아이를 애도하기 위한 추모공간이 만들어져있다. 지난 3일 베이비박스 인근에서 수건에 싸여 있는 영아의 시신이 발견됐다.(사진=이한형 기자)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출산한 뒤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2~3개월이 걸린다. 그 동안 갓난아이를 안고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데 매우 안타깝다"며 "우선 정부에서 먼저 지원을 한 뒤 나중에 행정절차를 밟으라는 게 이 법의 취지다. 물에 빠진 사람은 일단 건져 놓고 봐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설될) 상담기관이 미혼모의 출산과 초기 양육을 지원하고 최대한 본인이 키울 수 있도록 안내와 교육, 지원 등을 하게 돼 있다"며 "그럼에도 엄마가 도저히 아이를 키울 여건이 안 되고, 만약 아이와 엄마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을 때만 가명 출생신고를 해서 입양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 중 생모와의 상담을 통해 원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경우도 많았다. 최근 5년 동안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린 엄마 중 90%가 상담으로 연결됐고, 버려진 아이 중 20~30%가 매년 다시 엄마 품으로 돌려보내 졌다.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들은 엄마가 버린 게 아니고 엄마로 하여금 지켜진 아이들이다. 왜냐면 이 아이만큼은 살리려고 그 높은 언덕길을 올라오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16시간 걸리더라도 오는 것"이라며 "사랑출산법을 통해 초기 지원만 잘 되도 버려지지 않을 아이가 많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