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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쟁이, 귀머거리, 안질에 걸렸던 시다
골병·스트레스 시달리는 지금 노동자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년)에는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라고 시작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합창이 등장한다.

서방님은 "시퍼런 절단기에 싹둑 잘려" 여섯 개밖에 남지 않는 손가락으로 막노동판에라도 나가야 했고, "불쌍한 언니"는 오늘도 타이밍 약(노동자들에게 철야노동을 강제하며 사업주들이 제공한 각성제)으로 졸음을 이길 궁리를 하며 철야 작업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노랫가락에서 느껴지는 일본풍이나 몇몇 표현이 지금에 와서야 어색하고 거슬리기도 하지만 전태일이 살았고 또 죽어야만 했던 60-70년대의 노동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 만들어도 입어 봐도 자신은 못 입는 옷을 밤새 지어내다 "삼 년만 지내보면 귀머거리, 폐병쟁이"가 되는 처절한 시다의 삶을 강요받던 시대에 전태일이 있었다.

노동자 전태일은 스스로 길을 찾는 조사자이자 기록자였으며 활동가였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재단사는 대부분 23-50살의 남자였고 월급은 평균 3만원이었으나, 시다는 전체가 어린 여성으로 13~17살로 월급이 1800원에서 3000원이었다고 한다. 하루 수당으로는 14시간 노동에 70원이었다.

당시 신문은 전태일 등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 중 120명(95%)이 하루 14~16시간 노동을 하고 있고, 96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려 있으며,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곱이 끼는 안질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도했다.

"높이가 1.6m밖에 안 돼 허리도 펼 수 없는 2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 15명 정도씩 몰아넣고 종일 일을 시켜"도 "저임금에 휴일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지만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 기본 권리도 박탈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던 암흑 같은 시대에 전태일은 법전을 불사르고 몸을 태워 밝혔다. (당시에는 산업안전보건법과 분리되지 않았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노동자들의 삶과 건강을 지키라는 것에 불과하였다.

50년이 지났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은 아랑곳없이 성장을 추구하던 1970~80년대에 급격하게 증가하던 산재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쳐 조금씩 안정기 혹은 정체기에 들어섰다. 노동자들의 각성과 투쟁으로 노동조건과 안전보건의 수준도 높아졌으며 산재 적용대상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보다 산재율은 낮지만 산재 사망률은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이 넓어지고 숨겨져 있던 산재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당분간 산재 건수가 증가하는 것은 의의가 있다. 산재 사망 예방에 집중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노동자 건강권과 산재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야간 노동이 당연한 일이 아니며 밤에는 자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떨어지고 깔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것만이 산재가 아니라, 안 좋은 자세로 오래 일해서 생기는 골병(근골격계질환)도 산재라는 것을 안다.

손님은 왕이 아니며, 상사의 갈굼이 당연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직무 스트레스나 감정노동으로 인한 마음의 병도 업무관련성을 따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터의 위험은 점점 아래로, 사회적 권한과 권력이 낮은 이들에게 흘러 고이고 있다. 위험한 일들이 외주화되고, 외주화되어 더욱 위험해진다. 여전히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파쇄기에 노동자가 빨려 들어간다.

컨베이어에 몸이 갈리는 것은 협력업체 노동자이며, 이주노동자들의 팔다리가 그물 감는 양망기에 잘려나간다. 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쉬운 것은 고령 노동자이며, 인공지능(AI) 뒤에 숨은 자본에 노동을 갈아 넣게 되는 것은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그 시절 '시다'의 고단함은 오늘 '객공' 미싱사의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OECD에서 성별 임금 격차, 유리천장지수가 최악인 나라에서는 맘대로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시달리는 판매직 노동자와 이동 노동자들이 있다.

코로나 시대에 실업률은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 이주노동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중고령 노동자, 여성노동자에게로 위험은 전이되고 증폭되고 있다.

연대하고 뭉쳐 권력 격차를 줄이지 못한다면 장비를 갖추고 기능을 가진다 한들 '시다(보조)'일 뿐이다. 50년 전 전태일이 몸을 불살라야만 했다면, 오늘의 전태일'들'은 살아서 조사하고 기록하고 고발하고 연대하며 판을 갈아치우는 노동자이기를 빈다.

※이 기사(글)은 11월 9일 나온 <전태일50> 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전태일50> 신문은 전태일 서거 50주년을 맞아 오늘날 전태일들의 이야기를 신문으로 만들겠다는 현직 언론사 기자들과 사진가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비정규직 이제그만, 직장갑질119의 활동가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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