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21.3.5 서울중앙지법 A씨 재심 첫 심문기일 |
재판장 "A 피고인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심문기일이긴 하지만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생년월일이 어떻게 됩니까?
A씨 "1945년 X월 X일입니다"
재판장 "직업은 어떻게 되시죠?"
A씨 "무직입니다"
재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
그래픽=고경민 기자
5일 오후 4시 서울중앙지법 소법정. 재판부가 A씨의 이름을 부르자 방청석에서 대기하던 한 노인이 변호인들과 함께 피고인석으로 향합니다. 신원을 확인하는 재판부의 질문에 답변을 마친 뒤 자리에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던 A씨. 이날은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지 50년 만에 자청하여 피고인석에 앉은 날입니다.
변호인에 따르면 1970년 4월 5일. 당시 대학생이었던 A씨의 서울 동대문구 자취방에 느닷없이 사복 경찰관 여럿이 들이닥쳤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이들에 의해 인근 경찰서로 끌려간 A씨는 모진 폭행을 당하면서야 이유를 듣게 됩니다. 바로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보냈던 편지 한 통과 학자금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10년도 전에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A씨는 줄곧 다른 가족에게 맡겨져 살아와 아버지의 존재만 알 뿐 얼굴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A씨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날아온 편지와 돈이었지만 어떻게든 범죄로 만들어내려는 경찰의 수사는 무자비했다는 게 A씨의 기억입니다.
경찰들은 아버지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소속이라면서 "학비와 서신이 반국가단체를 위한 금품이었다는 점을 자백하라"며 A씨를 연일 고문했고 이에 못 이긴 A씨는 결국 허위로 혐의를 인정한다는 자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이러한 수사기록을 넘겨받은 검찰은 A씨를 기소했고 같은 해 10월 A씨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에게 금품을 받고 교신했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습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A씨 입장으로서는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 한 통과 학비 몇 푼을 받았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범죄자가 되버린 셈입니다.
수사부터 이후 수감생활까지 겪은 고초도 컸지만 이 억울함을 말할 수도 없다는 게 A씨의 마음을 더욱 짓눌렀습니다.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비극이었지만 엄혹했던 군부 독재 시절이었던 만큼 혹시나 잘못 입을 열었다가 더 큰 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늘 A씨를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내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의 문을 두드렸고 이에 구성된 변호인단은 수사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검찰에 소송을 통해 몇 가지 핵심 수사 기록을 입수하게 됩니다. 이를 토대로 A씨와 주변 사람들의 진술을 들은 끝에 재심을 청구할 핵심적인 근거를 발견합니다.
바로 실제 체포된 날과 다르게 기재된, 그마저도 수사기록마다 오락가락한 검거 일자입니다.
21.3.5 서울중앙지법 A씨 재심 첫 심문기일 |
변호인 "A씨는 1970년 4월 5일 식목일 오후 5시경에 동대문구의 자취방에 있다가 사복 형사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습니다. 이후 경찰서에서 자술서 작성을 강요받고 그 과정에서 허위 자백을 계속 요구 받으며 폭행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검거 보고서에 보면 4월 7일 낮 12시에 A씨를 검거했다고 기재돼있습니다. 검찰은 여기서 검거는 체포가 아니라 입건의 의미로 혼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수사 기록을 보면 1970년 1월 13일자에 간첩 용의자 '인지 보고'가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법적인 의미에서 입건이 시작됐기 때문에 4월 7일 입건 됐다는 주장은 설립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
스마트이미지 제공
A씨는 자신이 경찰에게 긴급 체포된 날을 명확히 1970년 4월 5일로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 경찰이 작성한 검거 보고서에는 4월 7일 낮 12시로 기재돼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수사기록에는 체포 일시가 4월 8일 오후 7시라고 적혔습니다. 체포 일자가 수사 기록마다 제각각인 것 그 자체로 허위로 꾸며졌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단서들입니다.
아울러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록상 8일에서야 발부됐는데 4월 5일 영장 없이 체포된 후 법적 근거 없이 해당 기간 동안 불법으로 구금돼있던 셈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기록상 4월 7일 '검거'는 입건의 의미를 혼용해 사용한 것이고 이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며 적법한 수사를 주장하지만 곳곳에 논리적인 허점이 많습니다. 이미 기록상 경찰은 그해 1월 13일에 A씨를 '간첩 용의자'로 기재해 사실상의 입건을 해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A씨의 물품에 대한 압수수색은 4월 6일 이뤄졌는데 이 조서에 A씨는 입건됐다는 의미의 '피의자'로 기재돼있습니다. 검찰의 무리한 주장을 정면 반박하는 물적 증거인 셈입니다. 4월 5일날 연행됐다는 게 맞다는 A씨와 그 지인들의 일관된 진술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21.3.5 서울중앙지법 A씨 재심 첫 심문기일 |
변호인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압수를 할 때는 피압수자에게 압수일시를 통지해주도록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4월 6일자 압수 당시에 A씨는 자신의 자취방 책상 서랍을 압수하는데 본인은 정작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지인을 대신 참석시켰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4월 6일 A씨의 집을 A씨가 없는 상태에서 압수할 수 있었다는 것은 4월 5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죠. 즉 A씨에 대해 영장 없는 긴급 구속이 있었다는 것을, A씨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수사가 위법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듯 당시 A씨의 편지 등 소유물을 압수했다는 '압수조서'는 4월 6일자로 작성돼있는데 정작 소유자인 A씨는 이에 동의나 참관은커녕 통보조차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당시 경찰은 A씨의 지인의 동의 하에 물품들을 임의제출받았다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해당 물품의 소유자가 아닌 이에게 물건을 받아갔다는 것 자체도 위법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A씨가 직접 참석할 수 없던 이유는 그 전에 경찰의 불법 체포로 구금돼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변호인의 주장입니다.
변호인은 이 대목을 강조하며 "4월 6일자로 압수했다는 것은 A씨를 긴급 구속한 후 출석권을 박탈한 채 이뤄진 불법 압수"라며 "피압수자가 없는 상태에서 압수가 이뤄진 것은 결국 전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즉 A씨에 대해 영장 없는 긴급 구속이 있었다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21.3.5 서울중앙지법 A씨 재심 첫 심문기일 |
재판장 "재심 신청에 대해 검찰의 의견이 있습니까? 의견서를 제출하셨던데요. 검사 "의견서 제출대로 기각함이 상당합니다" (중략) 검사 "4월 5일에 불법 체포돼서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계속 불법 구금 상태에 있었다는 건가요?" 변호인 "네 그렇습니다" 재판장 "문서송부촉탁 관련 검찰이 협조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사 "공안부랑 협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라 즉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
박종민 기자
검찰의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해 "기각해달라"는 입장을 낸 데 이어 변호인이 요청한 추가 수사기록 등 자료 제출 요구에도 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설령 해당 기록이 제출된다고 해도 긴 세월이 흐른 만큼 당시 피해를 입증해줄 진술과 증거는 최근 사건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런 만큼 당사자의 기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인데 이에 따라 다음 심문기일에는 A씨가 지금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에 대해 직접 법정에서 진술할 예정입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임을 입증하고자 다시 피고인 석에 선 A씨. 이번 재심 과정을 통해 50년 동안 그에게 따라다녔던 '죄인' 딱지를 떼고 무죄를 입증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