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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재판으로 옥살이…소년들 삶 앗아간 제주4‧3

제주

    불법 재판으로 옥살이…소년들 삶 앗아간 제주4‧3

    [제주4‧3, 짓밟힌 꽃망울⑥]
    모진 고문으로 형무소 끌려가
    한창 꿈 펼칠 나이에 옥살이
    출소하고 나서도 전과자 낙인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아이들이었다. 한창 꿈을 펼칠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살이를 한 소년들도 있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5일은 여섯 번째 순서로 꽃다운 나이에 수형 생활을 한 이들의 아픔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③"마구 때리고 고문"…소녀에게 제주4·3은 '악몽'이었다
    ④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⑤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⑥불법 재판으로 옥살이…소년들 삶 앗아간 제주4‧3
    (계속)

    양일화 할아버지(90)가 4·3 당시 겪었던 고초를 증언하다 상념에 잠겼다. 고상현 기자

     


    "정신없이 두들겨 패고 전기고문을 하는 거라. 이러다가 정말 죽을 거 같으니까, 묻는 말에 무조건 '예' '예'라고 대답했어."

    4‧3 당시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은 17살 소년은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한창 꿈을 펼칠 나이에 소년은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지난달 19일 제주시 연동 자택에서 만난 양일화 할아버지(90)는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73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불법 고문으로 형무소 끌려가…전과자 '낙인'

    중산간 마을인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서 나고 자란 양 할아버지는 4‧3 직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다. 하지만 1948년 11월 군‧경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에 타자, 양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사는 제주시내로 피신했다.

    "부모님은 해안 마을로 내려가시고, 나만 동네 친구들이랑 제주시내로 갔주게. 철없이 놀래 다니다가 경찰한테 붙잡히니깐 제주경찰서 1구서 감옥에 갇힌 거라."

    지금은 복원된 제주목 관아 자리엔 4·3 당시 제주경찰서가 있었다. 고상현 기자

     


    영문도 모른 채 감옥으로 끌려간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경찰은 양 할아버지가 중산간 마을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산사람(무장대)과 내통했느냐'고 집요하게 심문했다. '아니'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경찰의 문초는 계속됐다.

    "'너 산사람이지?' '산사람한테 돈 보냈지?' 계속 물어보는 거라. 하나도 맞는 게 없거든, 아니라고 했지. 그러니깐 땔나무 같은 거로 구타하는 거라. 바른말만 하라고 하면서."

    "말을 안 들으니깐, 전기고문을 하기 시작했어. 전선 같은 거로 뱅뱅 감아서 '부르르' 틀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지. 온몸이 마비되게끔 한 거라. 죽어질 거 닮으난 '이 말 대답하라' 하면 '예' 무조건 '예'만 했어."


    양 할아버지는 그렇게 불법 고문을 받고 1948년 12월 27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받아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았지만, '전과자'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빌레못 마을터. 4·3 당시 마을이 불에 타며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현재 과거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돌담만 남아 있다. 고상현 기자

     


    ◇16살 소년, '중년' 돼서야 고향 땅 밟아

    2019년 2월 향년 87세로 작고한 故 현창용 할아버지 역시 양 할아버지처럼 16살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고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 제주시 노형동에서 홀어머니를 도우며 살던 소년에게 4‧3은 느닷없이 찾아와 모든 것을 앗아갔다.

    현 할아버지는 생전에 제주CBS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집 인근 월랑초등학교로 끌고 가 '폭도와 연락했느냐'고 질문하더니 '모른다'고 하자 죽도록 두들겨 팼다. 모진 고문으로 산송장이 됐다"고 증언했다.

    고문은 끔찍했다. "목침대에 팔을 묶어요. 가축들 먹는 물을 코에 붓습니다. 그 물이 배에 가득 차요. 그럼 배를 발로 밟습니다. 끝까지 부인하니 총구를 머리에 갖다 댔습니다. 결국 경찰이 내민 백지에 손도장을 찍었죠."(2017년 9월 18일 인터뷰)

    인천형무소에 끌려갔을 때는 징역 5년형을 받았지만, 한국전쟁 직후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 징역 20년으로 형량이 줄어들어 1970년 초반이 돼서야 풀려났다. 16살 소년은 중년이 돼서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생전이던 지난 2017년 9월 故 현창용 할아버지가 제주CBS와 인터뷰하고 있다.

     


    현재까지 제주도에 신고된 4‧3 수형 피해자는 284명이다. 이 중 100명이 10대 때 형무소로 끌려가 징역을 살았다. 하지만 4‧3 당시 모두 3800여 명이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대부분 집단 학살 등으로 행방불명돼 피해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70년 만에 죄 벗었지만…이미 빼앗긴 젊음

    양일화 할아버지와 현창용 할아버지 모두 지난 2019년 1월 재심을 통해 '공소기각', 사실상 무죄를 받았다. 제주법원은 4‧3 당시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인정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할아버지는 70년 만에 죄를 벗었지만, 이미 젊음을 빼앗긴 뒤였다.

    옥살이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인민군, 한국군에 끌려 다니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양 할아버지는 당시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다음은 그 노래가사다.

    '동백꽃 붉게 피는 제주도 내 고향 / 천리 길 찾아 왔네 반갑습니다 / 우리들은 모여앉아 노래 부르며 / 달뜨는 저녁이면 손잡고 춤추네'
    양일화 할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불렀다는 노래가사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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