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남한 점령 첫날, 日경찰 韓군중들에 총격
뉴욕타임스 45년 9월 9일자. 1면 머릿기사로 '미군 한국항 접수' 제목이 보인다.(붉은선) 1면 하단에 '한국인들 상륙군의 위력 목도'라는 제목의 기사(파란상자)와 그 기사 말미에 인천항 참사를 싣고 있다. 일본경찰이 미군 점령군 환영 행사에 나온 한국인 노동자 500명에게 발포해 2명이 죽었다고 보도했다.(초록상자)
1945년 9월 2일 더글라스 맥아더 총사령관은 도쿄 앞바다에 정박한 미주리함 선상서 일본의 항복 서명을 받고 일본 통치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닷새 뒤 9월 7일 서울 하늘에 맥아더의 1호 포고령이 살포 된다.
'38도 이남에서 모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모든 행정 권한은 내게 있다. 공식어는 영어다. 점령군에 반하면 엄중 처벌한다'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이다.
특히 포고령 2호에는 '질서 교란 등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도 담겼다.
그런데 이 포고령에 따라 다음날인 9월 8일 일본 경찰이 한국 청년 2명에게 총을 쏴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인천항으로 입국하던 미군 점령군 환영을 위해 몰려든 우리 국민들이 근접불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에 대해 남한 군정 총책임자인 존 하지 장군은 9월 11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민간인들 접근금지를 명령했다. 그들이 미군 입국(landing) 작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무기 소지를 허락해야 했다. 왜냐하면 질서 유지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사령관 "일본인들은 가장 신뢰하는 정보원"
뉴욕타임스 45년 9월 10일 자 신문. 1면에 '미국, 질서유지 위해 한국 내 일본 지배자들 유지' 제하의 기사를 싣고 있다(붉은상자) 하지 장군은 11일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실 일본인들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정보원이다'고 말했다.(초록상자)
한국에 해방이 찾아왔지만, 일본의 실질적인 한국 지배는 미군정 초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는 미국 정부의 입장이기도 했다.
미국 3개 부처(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조정위원회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기본 초기 지시'에는 이렇게 명시돼 있다.
"사령관은 일본인들을 활용할 수 있다."(2항)
"예외적인 환경하에서는 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어떤 일본인들이라도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기용될 수 있다."(5항)
물론 해당 '지시'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환경 조성, 일본 권력층 배격 역시 기록돼 있지만, 일본(인)을 꼭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은 흔적들도 많다.
심지어 한국에서 사실상 통치자 역할을 수행한 하지 장군의 경우는, 일본에 의지해 한국을 통치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11일 언론 인터뷰에서 "사실 일본인들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정보원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 "내 생각에는 일본인들은 수년 내에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거나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왜냐면 한국은 일본 경제에 묶여있기 때문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한달간 日경찰 한국인 35명 살해"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내려가고(왼쪽), 성조기가 새로 게양되고 있다. 출처: US Navy 조선총독부 건물에 일장기가 내려간 뒤에는 세상이 바뀐 줄만 알았던 우리 국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군정 및 일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해방군으로 알았던 미군에 대한 실망감이 빠르게 확산한 것이다.
뉴욕타임스 45년 9월 11일 지면에도 미군정의 일본인들 유임 조치에 항의해 한국인들의 시위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 45년 9월 11일 자 1면. '한국인들, 일본군 유지에 저항해 거리행진' 제하의 기사를 싣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한국의 평화를 괴롭히거나 점령군을 적대시하는 행위는 사형 선고를 포함한 강력한 처벌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했다.(붉은상자) 도쿄에서 이 사실을 접한 맥아더는 "한국인들의 권리는 보호될 것이고 미군은 일본의 항복을 집행하기 위해서만 머문다"면서도 "한국의 평화를 괴롭히거나 점령군을 적대시하는 행위는 사형 선고를 포함한 강력한 처벌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군이 일본의 바통을 이어 한국을 점령했지만, 한국인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9월 12일 보도를 보면 해방 이후 일본 경찰은 한국인 35명을 죽였지만, 한국인들은 단 한 명의 일본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돼 있다.
일본 경찰에 목숨을 잃은 35명 가운데는 일본 경찰서를 접수하러 갔다가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학생 2명도 포함돼 있다.
미국 본국 역시 남한에서 싹트기 시작한 반미정서를 읽기 시작했다.
9월 10일 미국 '3개 부처 조정위' 내부 문건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일본 총독과 다른 일본 관료들을 당분간 유임시키기로 했다는 보고가 한국 내 미국의 위상에 불행한 영향을 미친다"고 기록돼 있다.(붉은상자) 출처: 미 국무부
9월 10일 3개 부처 조정위원회의 내부 문건을 보면 "주한 미군사령관이 일본 총독과 다른 일본 관료들을 당분간 유임시키기로 했다는 보고가 한국 내 미국의 위상에 불행한 영향을 미친다"고 돼 있다.
정치 문외한 군인들, 경험자 및 영어사용자에 의존
미국 국무장관 직속 W. 랭던 정치고문 대행이 45년 11월 26일 국무장관에 올린 기밀보고. 남한 내 여론동향, 점령 과정의 미숙성,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 등을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본문 참조. 출처: 미 국무부
그렇다면 미군정은 왜 남한을 통치하면서 일본 측 인사들의 협력을 구했을까?
미군들이 한국 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원광대 이재봉 명예교수는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1945년 9월 갑자기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들은 한국의 정치, 역사, 경제, 문화 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통치를 하게 됐다"며 "따라서 미군에게는 유경험자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유경험자'는 한국에서 행정과 정치를 해 본 일본인 지배계층을 말한다.
또 '말이 통하는 사람'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유한계급 즉, 일제 식민지 시대 영어를 할 줄 아는 유한계급이란 다름 아닌 친일파를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 국무장관 직속으로 한국에 파견돼 나와 있던 정치고문 대행 W. 랭던(Langdon)은 그해 11월 26일 다음과 같은 전문을 국무장관에 올린 것으로 돼 있다.
"미군정이 좌파들은 배제하고 부유층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부자와 보수적인 인사들을 편중해 채용했을 개연성이 높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누구인 줄 우린들 어떻게 알겠는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우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고용했고 그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친구들은 대체로 유한계급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영어는 사치품이니까."(사진 붉은상자)
이 전문은 이어 이 같은 현상에 대한 남한 여론도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내용도 담고 있다.
"미국 관련 좋지 않은 뉴스가 많다. 하지 장군이 아베 총독에게 한국의 일부 지주 세력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잘해줘서 고맙다고 칭찬했다는 소식, 명령에 불복해 하선장에 근접하려던 한국 청년들을 일본이 살해한 사건에 대해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소식, 미군 사령관들이 파시스트라는 소식 등이 있다."(파란상자)
해당 전문에는 특히 미군 스스로도 점령에 미숙했다고 실토한 부분도 나온다.
"우리 장교들이 한국 점령에 준비가 안됐다고 한다면, 장교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워싱턴을 비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일 것이다."(초록상자)
미국은 남한 점령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했나?
45년 9월 9일 서울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항복서명식을 주관하고 있는 존 하지 장군(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미국의 남한 점령의 목적은 단기적으로는 적국의 영토였던 한국에서의 일본군 무장해제였다.
이를 위해 9월 2일 도쿄 앞바다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주재한 일본국의 항복서명식과 별도로 9월 9일 서울에서도 하지 장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항복 서명을 받고 본격적인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미군의 한국 점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의 신탁통치였다.
총사령관(맥아더)을 위한 초기 지침서에도 '지침의 목적'으로 '일본 항복 초기부터 신탁통치 이전까지 사령관의 권한과 정책'으로 못 박고 있다.
미국은 이미 45년 8월 15일 이전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을 확정 지었다.
미 국무부의 '한국통'이었던 랭던 정치고문이 한국에 부임하기 전 1942년 2월 20일 작성한 '한국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이라는 보고서를 기반으로 이듬해 성안됐다.
오랜 식민지 시절을 거친 탓에 스스로 국가를 조직해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필리핀처럼 한국도 신탁통치 기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물론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에 넘어가지 않도록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본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미군정 돌입 이전부터 남한 전역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좌파계열의 자치 기구 및 정치 조직은 미군정이 철저히 배척했다.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식시키려던 구상에 걸림돌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재봉 교수는 "북한에 대한 후견인 역할에 머문 소련과 달리 미국은 미군정(military government), 즉 '정부'를 통해 남한을 '직접' 통치했다"며 "따라서 한국인 정치 지도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쳐 신탁통치안이 통과됐다.
이 같은 결정은 한반도에서 정치 격변을 초래한 것은 물론 신탁통치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놓고 미소 간 갈등을 낳아 한반도 분단 상태를 고착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