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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중정'은 왜 '홀치기 특허권자'를 잡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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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중정'은 왜 '홀치기 특허권자'를 잡아갔을까

    편집자 주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해 개인과 그 가족들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빼앗긴 사건이다. 독재정권은 사법부의 판결조차 무시했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은 너무도 쉽게 유린당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26일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한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그 전말]②
    기모노 염색 신기술로 일본시장 개척
    경쟁사들 무단 도용, 특허권 분쟁 심화
    박정희 수출 위축 우려에 중정 개입
    대법 특허 인정에도…고문에 특허권 포기
    문서위조 혐의 씌워 형사처벌까지

    ▶ 글 싣는 순서
    사라진 '기모노' 홀치기 특허권자 
    ②'중정'은 왜 '홀치기 특허권자'를 잡아갔을까
    대통령 한 마디에, 빼앗긴 인생…진실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류 수출품을 관람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류 수출품을 관람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홀치기(염색기법) 기술을 개발한 신경식씨는 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 의해 납치됐을까. 당시 신씨의 신기술이 대일 수출시장에 미친 파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시장 휩쓴 홀치기 신기술…경쟁사들 무단 도용

     홀치기는 원단에 여러 무늬를 넣기 위해 옷감을 잡아매는 일종의 염색 기법이다. 신씨는 '횡인교결포(요꼬비기)'라는 신기술을 개발해 지난 1965년 10월 발명특허(제1759호)를 받았다.
     
    이 신기술로 기모노 허리부분에 두르는 띠를 만들었는데, 기존 단순한 벌집모양에 입체감을 더한 디자인으로 일본 의류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지 언론들도 극찬할 정도였다.
     
    신씨의 요꼬비기 상품이 점점 더 일본 시장을 점령해가면서 국내 경쟁업체들이 특허기술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보세가공수출협회 통계를 보면 국내 홀치기 제품 수출업체는 1963년 1곳에서 시작해 이듬해 5곳 수준이었다. 신씨의 신기술이 개발된 해인 1965년 이후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는다. 1965년 12곳에서 1966년 35곳, 1967년 상반기에만 40곳으로 증가했다.
     
    지난 1965년 5월 초순경 공장에서 여성들이 요꼬비기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해당 사진 뒷면에 적힌 고 신경식씨의 자필 메모다. 아들 신용보씨 제공지난 1965년 5월 초순경 공장에서 여성들이 요꼬비기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해당 사진 뒷면에 적힌 고 신경식씨의 자필 메모다. 아들 신용보씨 제공
    결국 신씨는 수출단가 하락 등 과당 경쟁으로 피해를 봤고, 8천명에 달하는 숙련공을 양성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과 친인척 논, 밭까지 팔아 마련한 투자금조차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수출시장이 커졌지만 정작 본인은 손해를 보게 된 셈이다.
     

    특허분쟁 승소했지만…한 달도 안 돼 스스로 포기

     참다못한 신씨는 특허권 소유 사실을 10개 경쟁업체에게 고지했다. 업체들의 반응은 적반하장이었다. 오히려 특허권 무효 소송까지 제기했다. 요꼬비기 기술이 신기술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던 기술이라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다.
     
    1심에서는 경쟁업체 손을 들어줬지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하지만 대법원은 또다시 경쟁업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파기환송했다.
     
    결정타는 파기환송심에서 나왔다. 경쟁업체가 주장한 특허 출원 이전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이 요꼬비기 상품과 다른 데다 증거로 제출된 한국세관이 발행한 수출입 확인증도 날짜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신씨는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했고, 이 판결은 두 번째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4년여의 특허 분쟁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특허권을 인정받은 신씨는 그동안 입은 손해를 배상받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신씨는 국내 26개 수출업체를 상대로 1970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특허권 침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972년 5월 18일 1심에서 총 5억 22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신씨가 제기했던 배상 규모는 그가 입은 40개월의 피해 중 9개월치에 불과했다. 경쟁업체들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급해야 할 처지에 놓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당시로서는 거액의 배상액에 패소한 업체들 중 굴지의 대기업들도 포함돼 언론의 관심도 집중됐다.

    1972년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1972년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1심 선고는 경쟁업체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결국 선고 직후 열린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업체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신씨의 특허권 때문에 수출에 어려움이 있다'고 민원을 제기했고,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즉각 지시했다.
     
    대통령 지시에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중앙정보부였다. 중정은 신씨를 납치 감금한 뒤 나흘간의 고문 끝에 박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지 단 닷새 만에 신씨로부터 특허권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7년에 걸친 특허권 분쟁에서 승소하고도, 판결문의 잉크가 마를 새도 없이 신씨는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 신씨가 특허권 분쟁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얼마 뒤인 지난 1972년 5월 3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에 지장을 받는다는 업계 민원을 듣고 사건 경위를 다시 조사해 홀치기 수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내용이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보도됐다. 아들 신용보씨 제공고 신씨가 특허권 분쟁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얼마 뒤인 지난 1972년 5월 3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에 지장을 받는다는 업계 민원을 듣고 사건 경위를 다시 조사해 홀치기 수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내용이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보도됐다. 아들 신용보씨 제공
     

    재산권 강탈에…검찰 공작으로 '죄인 멍에'

     독재정권의 신씨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씨가 특허권을 포기했지만 언제 다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씨의 특허권 자체를 불법으로 몰아붙였다.
     
    특허권 포기 각서를 쓴 다음날인 6월 4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신씨를 허위공문서를 작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요꼬비기 상품이 신씨의 기술개발 이후인 1965년 5월초부터 생산돼 일본에 수출됐다는 내용의 관계부처 장관 발행 확인서가 허위라는 주장이었다.
     
    검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거듭 청구해 130일 넘게 신씨를 구금했다. 결국 신씨에게는 최종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이 과정에서 1차 청구를 기각한 판사는 이듬해 재임명에서 탈락했고, 1980년에서야 고등법원 판사로 재임용되기도 했다. 또 특허분쟁 소송에서 신씨의 손을 들어줬던 특허국 심판관 등 4명도 직위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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