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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단독]사라진 '기모노' 홀치기 특허권자

    편집자 주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해 개인과 그 가족들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빼앗긴 사건이다. 독재정권은 사법부의 판결조차 무시했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은 너무도 쉽게 유린당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50년이 걸렸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26일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한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그 전말]①
    기모노 염색기법 신기술 개발…특허 획득
    특허권 소송 승소…배상금만 5억원 규모
    언론사와 인터뷰 하러 나간 개발자…실종
    납치된 개발자 끌려간 곳…'중앙정보부 남산분실'
    승소하고도 특허권‧배상금 모두 포기

    ▶ 글 싣는 순서
    ①사라진 '기모노' 홀치기 특허권자
    '중정'은 왜 '홀치기 특허권자'를 잡아갔을까
    대통령 한 마디에, 빼앗긴 인생…진실은?

     
    고 신경식씨가 특허발명한 요꼬비기 기술로 지난 1965년 5월 초 염색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아들 신용보씨 제공고 신경식씨가 특허발명한 요꼬비기 기술로 지난 1965년 5월 초 염색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아들 신용보씨 제공
    '전쟁 전에는 히도매 시보리(염색 기법)요, 전쟁 후에는 요꼬비기 시보리 시대다. 요꼬비기 시보리가 사상최고의 붐을 일으키고 있다.'
     
    1965년, 일본의 직물 전문지인 염직(染織)신문에 나온 기사 중 일부다.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의 포인트가 되는 허리띠 천의 '염색 기법'(홀치기) 중 기존 히도매 방식보다 요꼬비기 방식을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처럼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꼬비기 방식을 개발한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기모노 염색기법 신기술 개발…특허 획득

    그의 이름은 신경식. 일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 1961년 1월 (주)한국산업기술컨설턴트센터를 설립했다.
     
    60년대 초 한국은 전쟁 이후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농업 이외에 산업기반은 생각할 수 없었고, 당장 먹을 식량과 석유를 살 달러를 벌기 위해 뭐라도 내다 팔아야 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경제정책의 핵심도 '수출'이었다. 또 가진 것이라고는 값싼 노동력밖에 없던 터라 주력은 경공업 제품들이었고, 그중에도 섬유가 중심이었다.
     
    신씨도 일본에 기모노 '홀치기' 가공제품을 수출했다. 한국의 홀치기 제품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자 대기업들까지 뛰어들면서 경쟁은 가열됐다.
     
    하지만 1965년 신씨가 개발한 신기술은 홀치기 수출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신씨가 특허까지 따낸 요꼬비기 이른바 교결포 방식의 염색기법은 일본에서 대유행을 일으켰다.
     

    특허권 소송 승소…배상금만 5억원 규모

     
    기모노를 입은 한 여성이 도쿄 시내를 걷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기모노를 입은 한 여성이 도쿄 시내를 걷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홀치기 제품은 1963년에 처음으로 1207 달러가 수출됐고, 1964년 수출액이 9만 446 달러로 확대됐다. 특히 신씨가 개발한 요꼬비기가 처음 수출된 해인 1965년 수출액은 115만 3510 달러로 전년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다. 이어 2년째인 1966년에는 287만 1638 달러, 3년째인 1967년에는 1444만 2천 달러로 5년만에 1천만 배 이상 폭증했다.
     
    기존 히도매가 벌집모양의 단순한 디자인인데 비해, 입체감을 드러내는 요꼬비기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히트를 쳤던 것이다.
     
    일본 수입업자들도 국내 납품업체들에 요꼬비기 제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수출길이 막힐 위기에 처한 수많은 국내 납품업체들은 요꼬비기 방식의 특허권자인 신씨를 상대로 특허권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신씨가 개발한 기술이 특허 등록 전부터 이미 통용되던 염색기법이라는 주장이었다.
     
    특허 소송은 4년 동안 이어졌고, 1969년 소송은 신씨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특허권 도용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신씨는 이겼다. 법원은 업체들에게 5억 22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이 1972년 5월18일이었다.
     

    KBS와 인터뷰 하러 나간 신씨…실종

     고생은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것으로 신씨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배상 판결 이후 열흘이 조금 지난 1972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는 전날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특허권배상 문제로 소송중인 홀치기 교결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사건의 경위를 다시 조사해서 과거부터 홀치기에 종사하는 영세민들이나 홀치기수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고 법이 잘못됐으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이낙선 상공부장관은 "이 사건은 상공부가 책임을 지고 화해를 시켜 홀치기 수출에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답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신씨의 큰 아들 신용보(69)씨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보도를 보고) 아버지는 수출강국 실현에 힘을 보태기 위해 피땀을 흘리셨는데,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는 말인가 싶었다"고 회상했다.
     
    바로 이날 'KBS 기자와 인터뷰를 하러 간다'고 나간 신씨는 실종됐다.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 하루만이다.
     

    납치된 신씨가 끌려간 곳은 '중앙정보부 남산분실'

     
    고 신경식씨 증명사진. 아들 신용보씨 제공고 신경식씨 증명사진. 아들 신용보씨 제공
    여러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던 신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들을 만났고, KBS로 가서 하자는 요청에 차를 탔다.
     
    하지만 신씨가 도착한 곳은 KBS가 아닌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이었다. 이때부터 신씨에 대한 고문이 시작됐다. 특허권을 포기하고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할 것을 강요당했다.
     
    신씨 회사 서울 사무소에 근무했던 신갑순씨(70‧여‧당시 21세)는 "사장님 출근 안하신 첫날 갑자기 2~3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와서 사무실 뒤지고 서류들을 다 챙겨갔다"며 자신도 중정 분실로 끌려갔었다고 진술했다.
     
    신씨는 "수사관이 홀치기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사무직 직원이라 아무것도 몰랐다"며 "어디선가 사람 비명 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했다. 무서웠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관이 '너희 사장도 밑에 와 있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실종 나흘만인 1972년 6월3일, 신씨는 결국 특허권 포기서와 소 취하서에 사인을 했다.
     
    이를 두고 당시 동아일보는 6월6일자 '승소에도 취하…그전말과 문제점'이란 제목의 기사에 "신씨의 소취하와 당시 특허국 심판관 4명의 직위해제로 홀치기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며 "새 기술개발이 저해될까 우려스럽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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