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가 짙게 낀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사곶해변에서 주민들이 해안가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서해 최북단 백령도에 주둔한 우리 군에 적어도 지난해까지 민간어선 대상 발포 매뉴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자국민 대상 발포 매뉴얼이 최근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에 논란이 예상된다.
불법조업 중국어선에 대해서는 '민간선박'이라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반면 정작 우리 어선에 대해서는 경고사격 등 적극적인 작전은 펼친 것을 두고 '이중잣대'라는 비판도 나온다.
농무로 인한 어선 통제에 항의성 출항하자 "월선선박 발포하겠다" 엄포
8일 인천 옹진군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과 백령도 장촌리 주민 등에 따르면 우리 군은 지난해 4월 22일 오전 8시경 백령도 장촌포구에서 출항한 백령선적 어선 7~8척에게 "발포하겠다"는 내용의 무전을 보냈다.
당시 바다 위에 짙은 안개(이하 농무)가 낀 상황이었는데 어선들이 출항하자 이를 막기 위한 의도였다. 우리 군을 민간선박들을 '월선' 의도로 출항했다고 간주했다. 이에 따라 월선 선적 포착시 무전 뒤 경고사격 등의 매뉴얼에 따라 어선에 경고 무전을 보낸 것이다.
다행히 경고 무전 뒤에 발포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우리 군이 민간선박에게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는 게 주민들의 전언이다. 당시 어민들은 "어떻게 민간선박에게 발포한다는 무전을 보낼 수 있느냐"며 군에 강력 항의했다.
이후 군은 "매뉴얼대로 대응했지만 실수였다"며 어민들에게 사과했다. 또 이를 상부에 보고해 교신 매뉴얼에서 발포 문구를 삭제하고 "월선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내용으로 대체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섬과 육지간 소통이 약화되다 최근 박남춘 인천시장이 '백령 주민과의 대화' 행사를 위해 인천시와 옹진군 등 관계기관과 함께 백령도를 전격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알려지게 됐다. 지난달 인천시와 옹진군, 통일부 등 정부기관과 자치단체 관계자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당사자와 군만 알던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것이다.
백령어민-군 어선 통제 갈등이 원인…어민 "그렇다고 월선선박 프레임 씌우나"
1년여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백령도 어민들이 이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건 이 사건이 우리 군이 접경지역 주민들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드러낸 사례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과 백령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사건은 '군이 출항어선을 월선 선박으로 간주한 원인'을 둘러싼 갈등이 핵심 쟁점이다.
먼저 군이 어선에게 '발포 경고' 무전을 보낸 계기에 대해 주민들은 "군이 출항 신고를 받아주지 않아서"라고 주장하고, 군은 "어선들이 신고없이 출항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5도는 지난해 11월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간어선이 출입항시 군의 통제를 받았다.
군은 서해5도 어선 출입항 업무를 해경에 이관하기 전까지 농무를 어선 통제 기준으로 간주했다. 현행법상 해상에 농무가 낄 경우 낚시어선은 통제할 수 있지만 무전시설과 레이더를 보유한 어선은 통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군은 접경수역에 농무가 끼면 어선의 출항을 통제했다. 월선 우려 때문이다.
문제는 '월선'을 판단할 기준이 모호하다는 데 있다. 백령도 특산물인 까나리 성어기는 매년 3~7월이다. 이 시기에는 농무가 자주 낀다.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백령도의 해양 안개일수는 100일로 전국에서 가장 빈번했다.
이 시기의 조업 실적에 따라 백령어민들의 연간 소득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백령도는 성어기 때마다 군과 어민들의 갈등이 이어졌다. 백령어민들은 지난해 발생한 '발포 교신 사건'에 대해 군이 '월선선박 대응 매뉴얼'을 조업통제 수단으로 악용한 사례로 인식하고 있다. 군이 일종의 항의 성격으로 출항한 어선들을 월선선박으로 간주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군으로부터 발포 경고 무전을 교신한 장세광(46) 백령 장촌어촌계장은 "생계를 위해 출항한 선박을 '월선어선'으로 규정하고선 발포하겠다고 어민들을 겁박한 것"이라며 "어떤 상황이라도 군이 민간인을 사격하겠다고 엄포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불법조업 중국어선엔 무대응…우리어선엔 발포 경고" 이중잣대도 문제
민간인에 대한 발포 매뉴얼이 최근까지 우리 군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우리 군이 '민간인'에 대해 이중잣대를 대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원일 서해5도 평화운동본부 간사는 "우리 군이 민간인들인 어민에게 총구를 겨눌 수 있는 매뉴얼이 최근까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이라며 "군이 서해5도 주민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장세관 어촌계장도 "가장 실망스러운 건 우리 군이 백령도 앞에 진을 치듯 몰려온 불법조업 중국어선에 대해서는 민간선박이라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정작 자국민에게는 발포하겠다고 겁박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해 최북단 NLL(북방한계선) 인근 불법조업 중국어선 문제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우리 정부의 해결 과제 중 하나다. 정부는 2017년 해양경찰청 산하 서해5도 특별경비단을 만들어 불법조업 중국어선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해군은 서해5도 특별경비단과 합동으로 불법조업 중국어선 나포작전에 협조하고 있다. 나포와 진압 업무는 해경이, 해군은 후방을 지키는 방식이다. 해군이 민간선박에게 발포하거나 통제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는 "지난해 '발포 무전 사건'은 우리 군의 실수였다"며 "다만 발포 무전은 월선을 막기 위해 어선 인근에 경고사격을 한다는 것으로 어민들을 겨눈다는 의미는 아니다. 확대해석하지 않길 바란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