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하우스키퍼 이영(원진아)과 짝수 강박증을 가진 호텔 대표 용진(이동욱). CJ ENM 제공※ 스포일러 주의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함께한 '남사친'을 좋아하는 '여사친', 그리고 빠른 결혼을 앞둔 그 '남사친'의 예비 신부. 잘생기고 능력과 선의까지 갖춘 호텔 대표와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하우스키퍼. 무명 시절을 딛고 크게 성공한 가수 겸 DJ와, 그 어렵던 시기를 동고동락하며 보낸 감수성 풍부한 매니저. 서로가 첫사랑이었으나 시대와 개인적 상황 때문에 엇갈렸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중년의 남녀. 학교에서도 소문난 미모의 여학생과 장난기 많고 허세가 앞서는 무리 속 가장 의젓한 남학생. 수년째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 열등감과 패배감에 빠진 공시생과 목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상담원.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데 매번 소개팅에서 퇴짜맞는 잘생긴 의사.
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해피 뉴 이어'(감독 곽재용)는 많은 사람이 머물고 또 떠나는 호텔 엠로스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14인의 이야기다. 제목과 극중 시간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 대놓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겨냥해 만들었다.
감독과 배우들이 따뜻한 정서를 담았다고 말한 것처럼 '해피 뉴 이어'는 '착한 영화'를 지향한다. 호텔 대표 용진(이동욱), 호텔리어 소진(한지민), 모닝콜 담당 수연(임윤아), 하우스키퍼 이영(원진아), 도어맨 상규(정진영) 등 호텔 사람들부터 5년째 공시생 재용(강하늘), 인기 가수 이강(서강준)과 매니저 상훈(이광수), 결혼식을 앞둔 라디오 PD 승효(김영광), 승효의 연인인 영주(고성희), 딸의 결혼식 때문에 귀국한 캐서린(이혜영), 단골 맞선남 진호(이진욱), 수영선수이자 소진의 동생인 세직(조준영),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아영(원지안) 등 호텔 투숙객·이용객들 중에서 악인은 없다. 답답하고 쩨쩨한 순간은 있을지라도.
주인공들은 제법 다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 짝사랑의 슬픈 결말을 맞이하고도 좋아하는 이의 새 시작을 응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꿈을 좇거나, 이윤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 방침을 고수한다. 오랜 시간 걸려 비로소 다시 만난 사이가 이루어지거나, 고백에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피 뉴 이어'가 딱히 '해피'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지나치게 전형적인 캐릭터와 평면적인 이야기에 김이 빠진다.
갖은 고생을 해가며 키운 가수가 자신의 곁을 떠날 것 같아 불안해하는 매니저 상훈은 너무 자주 운다. '엽기적인 그녀'에 나왔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할 때는 이게 정말 웃음이나 감동을 위해 넣은 것인지 갸웃했다. 자기 일엔 똑 부러지는 소진이 일상에선 빈틈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연습실 계단에서 매번 넘어진다는 설정을 반복하는 것도 지루했다.
지난 29일 극장과 티빙에서 동시 공개된 '헤피 뉴 이어'. CJ ENM 제공웃음을 주는 방식도 고루하다. 불운이 잇따르는 공시생 재용을 그리는 방식이 한 예다. 찌질함을 바탕으로 코믹하게 그리려는 듯 보였으나, 세상에 불만을 품고 호텔에서 인생을 하직하겠다는 결심을 한 캐릭터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민폐'가 부각된다. 한 생명을 살려야겠다는 목표 아래 재용을 예의주시하고 여러 가지 이벤트로 환심을 사려는 호텔 엠로스 직원들이 더 짠했다. 모닝콜 담당인 수연은 위험을 무릅쓰고 같이 죽는시늉까지 해야 했다. 호텔 노동자들의 업무 범위와 강도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설마 이 대사(장면)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싶었던 것들이 거의 다 실현된다. 특히 호텔 대표 용진과 하우스키퍼 이영의 이야기가 그렇다. 처음 엮일 때부터 마음이 깊어지는 과정까지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꽃뱀', '파렴치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개봉 시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예비 신부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소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승효, 결혼 당일에 오랫동안 널 짝사랑해왔노라 승효에게 고백하는 소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마음이 앞선다는 이유로 고백하고 친구가 하니 나도 한다며 뒤따르는 세직의 친구들… 등장인물별로 껄끄러운 내용을 툭툭 던져놓고는 '따뜻한 이야기'라고 강조하니 의아함만 커진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연말 영화'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도, 좀처럼 모이기 힘든 배우들을 잔뜩 모아 펼쳐낸 이야기치고 기대 이하다.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아서 아쉬움이 더 크다.
138분 상영, 12월 29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