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역의 김준수. 국립극장 제공국립창극단 신작 '리어'는 개막 전부터 기대요소가 가득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 우리 말과 소리를 입혔다는 점, 어벤져스급 창작진이 뭉쳤다는 점, 30대 초반인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각각 노년의 리어와 글로스터 백작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욕망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비극. '리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작품은 리어와 세 딸(거너릴·리건·코딜리어),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에드먼드·에드거)의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룬다.
두 딸에게 버림받고 폭풍우 몰아치는 벌판으로 내쫒긴 뒤에야 막내딸 코딜리어의 진심을 깨닫는 리어, 두 눈을 잃고 난 뒤에야 자신이 에드먼드의 음모에 속아 에드거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글로스터. 이들의 마주하는 광기와 파국, 회한은 극의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립극장 제공 사랑, 배신, 음모, 증오, 복수, 파멸 등 작품의 정서가 변화무쌍하다. 이들 정서는 우리 소리와 만나 독특한 질감을 갖는다. 작창을 맡은 한승석 음악감독은 "판소리 어법으로 작창하는 건 새로운 도전이었다. 풀리지 않는 부분은 민요에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귀띔했다. 여기에 작곡가 정재일의 다채롭고 세련된 음악이 더해져 극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작품은 인간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물(水)의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노자 사상과 엮었다. 이를 위해 달오름극장 무대에 20톤의 물로 채운 수조를 설치했다.
물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상징한다. 거울의 표면처럼 고요했던 수면은 약동하다가 급기야 흘러 넘치고 꽁꽁 얼어붙기도 한다. 미세한 물의 흔들림조차 허투루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폭풍우, 먹구름, 석양 등 자연을 오묘한 빛으로 표현한 조명도 일품이다.
국립창극단 간판스타 김준수와 유태평양의 활약이 단연 돋보인다. 그동안 나이 지긋한 배우들의 전유물처럼 여기지던 리어와 글로스터 백작 역을 밀도 있게 소화했다. '나이 듦'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물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특히 리어가 눈보라치는 벌판을 떠돌며 자책하는 장면과 사랑하는 코딜리아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코딜리아와 광대를 부지런히 오가는 민은경, 거지인 척 거리를 떠도는 에드가 역 이광복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조용했던 객석에 활기가 돌았다. 관객들은 박수로 장단을 맞추고 연신 웃음 폭탄을 날렸다.
연출·안무는 정영두, 극작은 배삼식, 작창·음악감독은 한승석, 작곡은 정재일, 무대 디자인은 이태섭이 맡았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오는 30일까지.
국립극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