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민 기자"'영끌'까지 했는데 계약 직전에야 '깡통전세'라는 것을 알아 식겁했다.""보증보험으로 전세금은 보장하면서 이사비, 이자지원금을 현금으로 준다며 유혹하더라."
이른바 '깡통전세'가 횡행하면서 부동산 거래를 처음 하는 2030세대 중심으로 "전셋집 구하기가 두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회초년생인 이들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더라도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로 눈을 돌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깡통전세는 전셋값이 매매값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아서 전세 계약 만료 뒤 세입자가 보증금을 다시 돌려받기 어려운 경우를 말한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매매가 대비 전셋값이 80%를 넘으면 깡통전세라고 부른다.
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신축 빌라에서 깡통전세를 이용한 전세사기가 횡행하면서 부동산 지식이 부족한 2030세대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신축 건물은 매매가 이뤄진 적이 없어 시세를 알기 힘들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최근 서울 관악구에 전셋집을 구하던 30대 초반 권모씨는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경험을 했다. '영끌'해서 모은 2억3천만 원과 대출 1억 원으로 전세 계약을 체결하기 직전에서야 해당 매물이 깡통전세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권씨는 "신축 투룸 전세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공시지가가 1억6천만 원으로 전세가가 훨씬 높았다"며 "이곳도 한 달 넘게 직접 돌아다니면서 고르고 고른 곳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오히려 부동산에서 깡통전세를 비난하면서 집을 보여주길래 덥석 믿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깡통전세는 서울·인천 등 수도권 지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공간 데이터 전문회사 빅밸류에 따르면 올해 1~6월 깡통전세 거래 건수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이 313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108건), 인천 부평구 부평동(95건), 서울 금천구 독산동(70건), 서울 양천구 신월동(65건) 순이었다.
최근 부동산 대출금리가 상승하고 부동산 가격은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깡통전세 위험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깡통전세 피해자 수백명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실시간으로 피해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에 거주하는 전세사기 피해자 A씨는 "8월 말 전세 계약 만료 날짜가 다가오면서 집주인에게 나가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는데 연락을 받지 않더라"며 "알고 보니 나에게는 알려주지도 않고 집주인이 바뀐 상태였다"고 말했다.
공인중개사 측에서 전세보증보험을 이용한 사기 수법으로 세입자를 유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세가를 전세보증보험을 받을 수 있는 공시지가의 150% 수준으로 책정한 뒤 '이사비', '이자지원금' 명목으로 세입자에게 일정 금액을 현금을 되돌려주는 식이다. 결국 전세 만료 시점에 부족한 보증금을 채워주는 보증공사 측에 피해를 돌리는 것이다.
이번 달 인천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임모(30)씨는 "5월에 1억3500만 원에 매매가 됐는데 전세를 1억8천만 원을 부르더라"며 "(중개업소 몫으로) 1500만 원 떨어지는데 거기서 자기들이 500만 원 받고, 1천만 원을 이자지원금 명목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전셋값과 매매가의 차액은 4500만원에 달하지만, 해당 액수를 보험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임대인과 임차인, 중개업소는 각각 이득을 챙기고 손해는 공적 보험이 지게되는 방식이다.
임씨는 "어차피 보증보험 통해서 돌려받기 때문에 내 돈 떼일 일은 없지만 결국 보험금을 악용하는 것 아니냐"며 "솔직히 세입자 입장에서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고 털어놨다.
이 같이 전세보증보험을 악용한 전세 사기도 크게 느는 추세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발생한 전세 보증금 반환사고는 1595건, 금액으로는 3407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깡통전세가 횡행하면서 2030세대들은 마음 놓고 전세집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부동산 거래를 난생 처음 하는 이들은 깡통전세를 식별하기가 힘들고, 결국 부동산 측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 쉽다는 것이다.
황진환 기자취업에 성공해 자취를 준비하는 B(29)씨는 "난생 처음 하는 부동산 거래라 대출 과정이나 확정 일자 등 설명이 너무 복잡하고 막막했다"며 "요즘 서울은 거의 전세값과 매매값이 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집을 찾을 수 있는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동산을 찾으면 공시지가의 150% 이내의 매물은 찾아보기 어렵고 이를 초과하는 매물이 훨씬 많은 실정이다. 결국 경제적 부담을 안고서라도 월세로 눈을 돌리는 이들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이직으로 본가에서 독립을 준비하는 C(33)씨는 "공시지가 150% 이내 전세 매물을 보여 달라고 하면 중개사가 '요즘 공시가로 하는 곳은 없다'며 훨씬 높은 전세가 매물만 보여주더라"고 말했다.
또 "전재산과 대출까지 모았는데 (사기) 당할까봐 우선 월세로 살다가 나중에 전세를 알아보려고 마음을 돌렸다"며 "당장 (월세가) 아깝긴 해도 불안한 마음으로 2년을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12년째 영업중인 한 부동산 관계자는 "요즘 오는 젊은 직장인이나 대학생들 대부분이 전세사기를 많이 물어본다"며 "전세 계약 직전에 월세로 다시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형사정책연구원 승재현 연구위원은 "대표적인 전세사기인 '세 모녀 사건'을 분석해보면 30대 미만이 90%, 3억 원 이하 부동산이 90% 수준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며 "결국 대학생, 사회초년생이 다수 피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세 세입자가 원한다면 보증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하고, 집주인의 국세 체납 여부 등 정보를 공개하고, 신축 빌라라도 대략적인 시세를 파악하도록 하는 등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지난달 28일 '전세사기 전담수사본부'를 설치해 집중 단속에 나섰다. 또 시·도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와 각 지역 경찰청 지능팀을 중심으로 전담수사팀을 지정했다. 경찰은 전세사기 피해자들로부터 피해 내용을 접수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