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덴부르크 선을 넘는 마크 V 전차. 위키미디어 공용 캡처기동전이란 전차와 헬기 등 가장 이동성이 뛰어난 무기를 동원해 적군을 선제 타격함으로써 적의 전투 의지를 초반에 마비시켜버리는 전투 방식이다.
반면에 진지전은 일정한 방어 지점에 방벽을 설치한 채 적의 진격을 막는 방식이다. 1차 세계대전 때의 참호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건설한 마지노선과 독일군이 이에 맞서 설치한 지크프리트선이 대표적이다.
1939년 11월 3일 마지노선의 셍하인 요새로 도개교를 건너 행군하는 51 하이랜드 사단의 부대. IWM 캡처사실 군사학에서는 기동전과 진지전은 서로 다른 전투개념이 아니다. 훌륭한 지휘관은 기동전에 앞서 적의 역습에 대비해 먼저 튼튼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일부터 했다.
윤석열 정부와 함께 컴백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검찰을 단번에 장악하고 고위 공직자 인사검증 권한까지 쥐었다. 그리고서 이른바 검수완박 무력화 작업에 나섰다. 검수원복이라고 불리는 검찰수사권 원상복구에 나선 것이다.
얼마 전까지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한동훈 장관의 기동전에 지금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여권 내에서 한동훈 법무부가 윤석열 정부 장관과 부처 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일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박종민 기자한동훈 법무부가 이처럼 기습적이고 전광석화 같은 전술로 기동전을 펼치고 있다면 법제처는 잘 보이지 않는 후방에 진지를 치고 앉아 적의 역습에 대비하고 아군의 기동전을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모양새다.
법제처는 행정 각부의 입법 활동과 국회의 입법 추진을 총괄하고 지원, 조정하는 부처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위한 일종의 후방 지원부대인 셈이다. 법제처는 그래서 직급이 차관급이고 1962년 설치된 이래 존재감 면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그야말로 '조용한 부처'였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들어 법제처의 활약이 눈에 띈다. 아마도 부서 설치 이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절인 듯하다.
이완규 법제처장. 연합뉴스법제처는 최근 검수원복을 위해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를 확대한 한동훈 법무부의 시행령이 검찰 수사권을 축소한 검찰청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렸다. 시행령이 법으로 규정한 40일 이상의 입법예고 기간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제때 정비해 사법체계 혼란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법무부를 옹호했다.
법제처는 이에 앞서,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 신설도 입법예고 기간이 단 이틀이었지만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해석했고 경찰국 신설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경찰국 신설이 "명백한 위헌이고 법치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말한 이명박 정부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일갈은 변방의 북소리일 뿐이다.
이는 현직 대통령과 역대급으로 가까운 실세 법제처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
검사 출신인 이완규 법제처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창으로 사법연수원 동기다. 2020년 11월 윤석열 검찰총장 직무배제 집행정지 심문 때는 윤 총장의 법률 대리인을 맡았다.
검사 시절인 2003년 '전국 검사와의 대화'에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 면전에서 쓴소리를 한 강단도 있다. 그런 강단이 친구와의 인연 때문에 법제처를 정권수호의 진지로 만드는 용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법무부가 지금 윤석열 정부의 시행령 통치를 이행하는 기동대 역할을 하고 있다면 법제처는 시행령 통치를 방어해주는 진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완규 법제처의 현재 위상은 사법부는 물론 헌법재판소에 우선하는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법제처가 법률적 다툼이 있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법무부와 보조를 맞추는 것은 법제처 존재의 의미를 의심케 하는 상황을 부른다.
다음 달 10일이면 수사검사와 기소검사를 분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검찰수사권 조정안이 시행된다. 법무부는 시행령도 모자라 예규를 통해 수사검사의 기소권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 및 시행규칙 폐지안 입법예고 브리핑을 갖고 있다. 황진환 기자
윤석열 정부의 시행령 통치는 수사권 조정과 경찰국 신설 등 위헌 논란이 일고 있는 여러 사안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시행령에 의해 처벌받은 피의자가 법원에 위법 여부 판단을 요청할 경우 결국 법원이 사안마다 일일이 결정해야 하는 혼선이 생길 수 있다.
법무부는 이럴 때마다 시행령을 개정해야 하고 법제처는 새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꼼수가 꼼수를 낳을 수 있는 악순환이 우려된다.
법제처는 행정부와 국회의 입법활동을 조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국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행정부의 국정 수행을 돕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완규 법제처장. 윤창원 기자윤석열 정부는 '시행령 정부'라 불릴 정도로 '3권 분립' 차원에서 상식을 벗어난 길로 가고 있다. 그 쌍두마차를 이끄는 이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완규 법제처장이다. 특히, 이완규 법제처장은 법제처를 법무부의 기동전을 뒷받침하는 진지 정도로 생각한다면 검찰주의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법무부의 동업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완규 법제처장은 법무부와 함께 시행령 통치를 정당화하는 참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엄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