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공동취재단고환율‧고물가 흐름이 여전한 가운데 레고랜드 사태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 가속화 현상까지 겹치면서 한국은행이 딜레마 상황에 놓인 모양새다. 고물가와 강(强)달러에 대응하기 위해선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려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시장에 돈이 더 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올해 한 차례 남은 11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를 둘러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기존 예상대로 추가 '빅스텝' 조치가 단행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 반면, 기준금리 인상폭을 줄이는 속도조절 또는 동결조치 전망까지 나오는 등 전문가 의견도 교차하고 있다.
한은은 지난해 8월부터 이번 달까지 여덟 차례 지속적인 인상 조치를 통해 기준금리를 연 3.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특히 이번 달엔 통상적인 인상 수준의 2배인 0.5%포인트 빅스텝 조치를 올 7월에 이어 한 번 더 밟았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우리 기준금리를 추월해 그 격차를 벌이면서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는 한편, 물가 안정 목표치를 상회하는 고물가 상황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한은의 강경 대응에도 25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장 초반 1444.2원까지 치솟아 연고점을 경신했다가 1433.1원으로 하락 마감하며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날 발표된 한은의 10월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경제주체들이 예상하는 향후 1년 동안의 물가상승률을 뜻하는 기대인플레이션율도 전월 대비 0.1%포인트 오른 4.3%로 집계됐다. 석 달 만에 다시 상승 전환한 것이다. 이는 이창용 한은 총재도 부인하지 않은 11월 추가 빅스텝 전망에 힘을 싣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에선 레고랜드 사태에 따른 시장 불신이 촉매제로 작용해 채권 투자 수요가 급감하고 금리가 급등하는 등 자금경색이 가속화 하면서 금융안정성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까지 설상가상으로 겹쳤다. 우량 공사채마저 투자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돈 흐름이 막히면서 제2금융권과 기업을 중심으로 위기론이 확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은으로선 마냥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한은 금통위가 11월 회의 땐 물가보다도 단기 금융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빅스텝 대신 0.25%포인트 기준금리를 소폭 올리는 베이비스텝을 밟는 등 속도조절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현주 자본시장연구원 거시금융실 연구원은 "한은으로선 11월 금통위까지 시간이 있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단기 자금시장 경색에 대처하는 것"이라며 "(현 상황이 지속되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물가 안정도 금융 시스템의 안정이 유지돼야 계속 추구해 나갈 수 있다"며 "현 상황으로만 봐서는 (기준금리 인상을) 쉬어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이와 달리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 기조 유지론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물가가 여전히 높고, 미국과의 금리 격차 확대로 인한 통화 가치 추가 하락을 막으려면 통상 폭 이상의 기준금리 인상은 지속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신용 리스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금융지원이 병행돼야 하는 것"이라며 "금리인상 기조가 변화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상승) 진행으로 인해 추가 위험요소가 등장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50조원+α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 가동'. 연합뉴스한편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23일 '50조 원 플러스 알파' 규모의 유동성 공급 정부 대책이 발표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직후 "(이번) 자금시장 안정 방안은 최근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중심으로 신용 경계감이 높아진 데 대한 미시 조치라서, 거시 통화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통화정책 기조 변화 가능성에 거리를 둔 것으로 풀이됐다.
이 총재는 다만 한은 대출 시 담보 대상이 되는 증권(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나 공공기관채 등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는 기존 입장은 전날 국정감사에서도 재확인했다. 현실화 되면 은행 입장에선 자금을 조달할 때 은행채 발행 규모를 줄일 수 있어 채권시장 안정에 일정부분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