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국 영화계에는 기쁨과 환희는 물론 예상치 못한 슬픔까지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첫 천만 영화가 탄생하며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결국 '범죄도시 2' 이후 천만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원조 월드스타'이자 한국 영화계를 든든하게 지탱해 온 배우 강수연이 세상을 떠나며 영화계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비록 강수연은 별이 됐지만 그가 세계에 남긴 족적을 따라 한국 영화인들은 세계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인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는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전 세계에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두 주역 황동혁 감독과 이정재는 '최초'라는 수식어와 함께 미국 에미상에 대이변을 일으켰다.
한국 영화인들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로 무대를 넓히며 보다 큰 활약을 예고했다. 그리고 칸을 비롯해 전 세계에 '헤결앓이'로 빠트린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을 통해 봉준호 감독이 쓴 '기생충'의 신화 재현에 나섰다.
각 배급사 제공 올해 천만 영화는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나온 '범죄도시 2' 한 편뿐
올해 영화계는 상반기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첫 천만 영화인 '범죄도시 2'의 등장으로 침체된 극장가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됐다.
5월 18일 개봉한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 2'는 개봉 25일째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무려 3년 만에 첫 천만 영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역대 20번째 천만 한국 영화라는 대기록을 쓴 '범죄도시 2'는 개봉 40일째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첫 천만이자 올해 첫 천만 영화가 된 '범죄도시 2'는 올해 마지막 천만 영화로 남게 됐다. 여름 텐트폴(라인업에서 가장 흥행 가능성이 큰 영화 혹은 성수기 대작 영화) 시장에 '외계+인 1부' '비상선언' '한산: 용의 출현' '헌트' 등 무려 4편의 대작이 쏟아졌지만, 천만 돌파는커녕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한산'과 '헌트' 단 2편뿐이었다.
전문가들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확대와 코로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며 영화에 대한 평가가 냉정해졌고 '콘셉트'의 명확성을 잃어버리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 영화계가 올여름을 되돌아보며 '콘텐츠' 자체로 승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우 강수연. 이한형 기자 별이 된 원조 월드스타 강수연…슬픔에 빠진 영화계
무엇보다 올 한해 영화계에 가장 큰 충격은 원조 월드스타 강수연(55)의 비보였다. 지난 5월 5일 자택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에 이송, 뇌출혈 진단을 받고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치료를 받아오던 강수연은 이틀 뒤인 7일 세상을 떠났다.
1969년 4세 나이에 동양방송(TBC) 전속 아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로 대종상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이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7)를 통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월드 스타'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한국 배우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건 강수연이 최초다.
임권택 감독과 다시 한번 작업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 삭발 투혼을 보인 강수연은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는 등 국내외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10회 넘게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송강호. CJ ENM 제공 칸과 에미상 휩쓴 韓 감독과 배우들의 '최초'의 기록들
오래전 강수연이 연 글로벌 무대로의 문은 2022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는 칸의 영광을 재현했고, 황동혁 감독과 이정재는 비(非)영어 콘텐츠와 비영어권 나라 배우들을 향해 높은 벽을 자랑했던 미국 에미상을 넘었다.
우선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송강호는 한국 남자 배우 최초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되고, 박찬욱 감독은 감독상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2019년 한국 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이후 3년 만에 다시금 한국 영화의 저력을 입증했다.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한국 영화 '브로커'에서 열연을 펼친 송강호는 '괴물' '밀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박쥐' '기생충' '비상선언'에 이어 7번째 칸 레드카펫을 밟았고, 칸 경쟁 부문에만 4회 초청되며 한국 배우 최다 초청 기록을 세운 끝에 한국 남자 배우 최초로 칸 남우주연상을 받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11번째 장편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의 영예를 품에 안았다. 박 감독은 지난 2004년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2016년에는 '아가씨'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바 있으며 감독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이자 한국 드라마 최초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 연합뉴스한국 영화계가 세운 '최초'의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방송계 오스카'로 불리는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이자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드라마 시리즈 부문 감독상(황동혁)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받았다.
말 그대로 '최초'의 역사이자 전 세계가 열광한 '사건'이었다. 지난 1949년 1월 25일 첫 시상식이 개최된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제작한 드라마가 에미상 후보에 오른 것도 '오징어 게임'이 '최초'이며, 수상한 것 역시 '최초'다. 이에 외신들은 "새 역사를 썼다"고 평가했다.
봉준호 감독 신작 '미키17' 티저 트레일러. 워너브러더스 트위터 캡처 세계로 무대 넓히는 韓 배우와 감독들
2019년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사를 다시 쓴 봉준호 감독을 시작으로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까지 한국 감독과 배우들이 이룬 성과들은 한국 영화계의 활동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혔다.
영화 '기생충'으로 전 세계 평단과 관객들을 사로잡은 봉준호 감독은 세계적인 영화사인 워너브러더스와 손잡고 SF영화 '미키17'의 각본과 연출을 맡아 제작에 전념하고 있다. 2024년 3월 29일 극장 개봉을 확정한 '미키17'에는 '테넷' '더 배트맨'의 배우 로버트 패틴슨을 비롯해 틸타 스윈튼,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아키, 토니 콜레트, 스티븐 연 등이 출연을 확정했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 촬영 중인 아만들라 스텐버그, 이정재, 레슬리 헤드랜드 감독. 월트디즈니컴퍼니 제공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통해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에미상의 장벽을 넘은 이정재는 디즈니와 손잡고 본격적인 할리우드 활동에 들어갔다. 루카스 필름이 제작하는 새 시리즈 '애콜라이트'에서 이정재는 아만들라 스텐버그, 매니 자신토, 다프네 킨, 조디 터너 스미스, 레베카 헨더슨, 찰리 바넷, 딘-찰스 채프먼, 캐리 앤 모스 등 할리우드 톱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영화 '늑대사냥'으로 해외 영화제와 평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김홍선 감독은 봉준호·박찬욱 감독에 이어 할리우드 유명 에이전시 WME와 계약을 맺었다. 특히 김 감독의 계약은 지난 2014년 봉 감독 이후 약 8년 만에 이뤄진 한국 감독의 계약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과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칸영화제·CJ ENM 제공 '칸 감독상'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으로 '제2의 기생충 신화' 쓸까
2022년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도 한국 영화계는 다음 활약을 예고했다. 칸을 사로잡은 박찬욱 감독은 이제 오스카에서 이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나선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제95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한국 영화 출품작으로 '헤어질 결심'을 선정했다. 인디와이어를 비롯한 버라이어티, 할리우드리포터, 뉴욕매거진 등 외신에서는 일찌감치 '헤어질 결심'을 오스카 주요 부문의 유력 후보로 점찍었다.
일찌감치 세계 언론은 '헤어질 결심'을 주목하고 있었다. 영국 언론 BBC는 10월에 놓쳐서는 안 될 개봉 예정 영화 10편 중 한 편으로 '헤어질 결심'을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피플과 뉴욕타임스, 가디언은 '올해의 영화 10'에 '헤어질 결심'을 포함했다.
오스카 레이스를 앞둔 '헤어질 결심'은 미국을 대표하는 시상식 중 하나로 꼽히는 제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외국어 영화 부문 후보에 이어 오스카와 함께 미국 대표 시상식으로 명성이 높은 제80회 골든글로브 비영어권 작품상에 이름을 올렸다.
박찬욱 감독과 '헤어질 결심'이 세계 영화사에 어떤 또 다른 족적을 남기며 한국 영화의 영광을 이어 나갈지, 이제 2023년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