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 윤제균 감독. CJ ENM 제공※ 스포일러 주의
민족의 독립이라는 무거운 책임감과 비장함으로 무장한 뮤지컬 속 안중근 의사는 무대와 객석 사이 거리감만큼이나 쉽게 다가가기 힘든,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영웅'이다. 그러나 영화 '영웅' 속 안중근 의사는 때때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점이 바로 윤제균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재판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 '영웅'이다. 영화는 그 이전에 안 의사에게도 '삶'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평범한 누군가가 시대를 만나 어떻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고 권한다.
이를 위해 안 의사와 그의 조력자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와 개연성을 가져야 했다. 과연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가져오며 '영웅'이라는 이야기에 어떠한 것을 더하고 빼며 최종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수정에만 6개월…윤제균 감독이 시나리오에 공들인 이유
▷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감독의 손길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덜어낸 것은 무엇이고 더한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시나리오에 공을 되게 많이 들였다. 원작과 대본이 있는데, 이를 두고 6개월 이상 수정했다. 왜냐하면 공연 예술을 관람하는 관객의 허용 범위는 영상 예술 관객과 많이 다르다. 공연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고 시청각 거리가 정해져 있다 보니 관객들의 이해 범위가 넓다. 그에 반해 영화라는 영상 예술은 그 허용도가 너무 박하다.
내용 자체의 개연성이 없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관객은 전 세계 관객 중 제일 수준이 높고 제일 까다롭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관객이 만족하는 콘텐츠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런 관객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스토리와 개연성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충분히 허용됐던 걸 영화로 옮겼을 때는 허용되지 않는 부분을 철저히 검증했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 어떤 부분들이 검증을 거쳐 스토리와 개연성을 더했나? 첫 번째는 안중근 의사의 과거사를 좀 더 보강했다. 물론 공연에서도 대사를 통해 나오지만, 많은 관객이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사라는 건 알지만 군인이라는 걸 잘 모른다. 안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대고, 계몽을 위해 학교(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설립했다가 망했다.
이후 군인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회령전투에서 풀어준 일본군 포로의 밀고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수백 명이 전사하게 된다. 대의명분으로 풀어준 포로가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가 됐고, 동지들이 다 죽었다. 이후 단지동맹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자 한다. 이런 서사는 공연에서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없으니, 영화 초반 회령전투에 그만큼 힘을 주고 찍었다. ▷ 안중근을 둘러싼 캐릭터들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공연에서 마두식(조우진), 마진주(박진주)는 중국인이었는데 한국인으로 바꿨다. 뮤지컬에서는 이토 역도 한국어로 대사하는 게 허용되지만 영화는 안 된다. 그렇게 일본어로 하기로 한 순간 한국어, 일본어에 중국어까지 들어가면 너무 번잡할 것 같았다. 또 하나 크게 설정을 바꾼 게 마진주다. 뮤지컬에서는 나이 차도 많이 나는 유부남인 안중근 의사를 짝사랑하는 데 이보다는 비슷한 또래의 유동하(이현우)와의 풋풋한 첫사랑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서사와 개연성 더하며 선명하게 되살아난 설희
▷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서사와 개연성을 더하며 보다 선명해지고 설득력을 가진 캐릭터가 김고은이 연기한 설희 아닌가 싶다. 공연에서 설희는 미션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토를 처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사람이 설희인데 왜 처단을 안 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설희가 이토를 바라보며 연민의 정이랄까 애증을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과감하게 이를 삭제했다. 대신 설희에게 정보원으로서 정확한 미션을 줬다.
하얼빈역까지 오면서 이토를 처단하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설희는 이토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그런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설희는 이토를 못 죽인다. 그렇게 개연성을 확보했다.영화 '영웅' 촬영 현장에서 윤제균 감독(사진 좌)와 배우 김고은. CJ ENM 제공 ▷ 서사의 추가 외에도 영화에는 뮤지컬에는 없는 오리지널 넘버(뮤지컬에서 사용되는 노래나 음악)인 설희의 솔로 넘버 '그대 향한 나의 꿈'이 나온다. 어떻게 탄생한 곡인지 궁금하다. 초반에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인물이 바로 설희다. 공연에서는 이토가 조선을 발판 삼아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며 건배를 외치는 장면이 있다. 처음으로 이토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인데(넘버 '이토의 야망'), 그 신에서 그냥 다음 신으로 넘어가기 싫었다. 이토의 야욕이 드러났을 때 그걸 바라보는 설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이를 단순히 대사나 표정 하나로 넘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황상준 음악감독에게 새로운 넘버가 있으면 좋겠다면서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 내가 네 옆에서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는 게 죽는 것보다 싫다, 죽는 게 차라리 편하다, 내가 안 죽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가사를 내가 직접 썼다. '그대 향한 나의 꿈'에서 '그대'는 설희가 평생을 어머니처럼 모신 명성황후다. 그런 설희가 죽어도 살아야 하고, 슬퍼도 살아야 하는 건 하늘이 주신 운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 그렇게 서사를 쌓은 설희를 보며 그의 표정과 행동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설희에게 주어진 운명은 첫 번째가 정보원이고, 그 미션이 끝나면 죽겠다는 또 다른 미션을 갖고 있다. 시나리오를 각색했을 때, 이토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거든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라도 배후를 밝혀내라고 명령한다. 설희는 두려운 거다. 혹시라도 고문받다가 자기가 모든 사실을 불까 봐서 말이다. 그래서 설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죽는 거밖에 없는 거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영웅' 안중근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 영화 '영웅'을 통해 감독이 그려내고 싶었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있었을 것 같다. 안중근 의사의 영웅다운 모습을 공연이나 영화나 똑같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가장 영웅답지 않은 모습도 많이 나온다. 아내와 어머니와 자식을 걱정하는 평범한 남편이자 아들이자 아빠이기도 하다. 부부싸움도 하고 농담도 한다. 웃기려고 넣은 게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독립군이라고 항상 비장하고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도 하고 평범한 일상을 산다. 영웅도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감독이 생각하는 '영웅'이란 어떤 존재인가?
영웅이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회령전투가 없었다면 안 의사도 계속 군인의 길을 갔을 수도 있고, 만약 이토가 채가구역에 내렸다면 조도선이나 우덕순이 안중근 의사처럼 될 수 있었다. 만약 안 의사가 그 시대에 안 태어나고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갔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안 의사처럼 할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뮤지컬을 보면서도 안중근 의사가 멋있다, 자랑스럽다는 생각보다 너무 불쌍하고 너무 죄송했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다. 그런 영웅이 훗날 독립이 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직도 돌아오시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이 못 지킨 것이다. 그게 너무 죄송했다. 그래서 영화 맨 마지막에 글귀를 남겨놓은 거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 마지막으로 예비 관객들에게 '영웅'을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달라. '아바타: 물의 길'이 시각적으로 즐거운 영화라면 '영웅'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다. 그 차이가 뭔지 한 번 느껴보시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영화도 극장에서 보면 시청각의 향연을 느끼실 수 있다. '아바타'가 3D에 최적화된 영화라면, 우리 영화는 5.1채널 일반관에 최적화된 영화다.(웃음) 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다. <에필로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