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전 의원. 박종민 기자"벼랑 끝에 몰린 나경원 전 의원을 대통령실이 아예 벼랑 아래로 밀어버렸다."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나 전 의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과 기후환경대사에서 동시에 해임한 것을 두고 당내에서 나오는 말이다. 용산의 뜻이 노골적으로 전해짐과 동시에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친윤을 위장한 반윤'이라는 비난과 함께 가세하면서, 나 전 의원을 당 대표 출마 쪽으로 떠미는 압력은 더 세졌다.
대통령실이 이날 나 전 의원을 해임하면서 '해촉'이나 '사표 수리' 대신 사용한 단어는 '해임'이다. 나 전 의원이 '그만둔다'가 아니라 대통령실이 나 전 의원을 '그만두게 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하려는 의도다. 게다가 나 전 의원이 이날 오전 대통령실의 반발을 산 배경이었던 출산 정책과 관련해 저출산위 부위원장 직에 대해서만 사직서를 제출했던 걸 감안하면, 두 직책 '동시' 해임은 징계성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윤 대통령이 전당대회에 개입하는 모양새까지 각오하며 노골적인 '윤심'을 드러낸 셈이다.
나경원 전 의원 페이스북 캡처앞서 나 전 의원이 이날 페이스북에 "나는 결코 당신들이 '진정으로'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적은 것이 해임까지 결정한 대통령실 입장의 배경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보통 브리핑이 없는 금요일에 오후 5시 브리핑이 갑자기 잡힌 것은, 나 전 의원의 사직서 제출에 '입장없음'으로 표현됐던 대통령실 기류가 급변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전 의원의 페이스북 글은 자신의 불출마를 압박해온 친윤 주류와 선을 그으면서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지만, 대통령실 반응은 반대였던 셈이다.나 전 의원 측도 대통령실 반응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불쾌하거나 반발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나 전 의원 본인도 "어느 자리에 있든 윤석열 정부의 성공과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모습을 최대한 자제했다. 앞서 나 전 의원이 이날 윤 대통령과 부인인 김건희 여사가 찾았던 충북 단양 구인사를 방문한 것도 대통령실에 맞설 의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향후 나 전 의원의 정치적 스탠스를 예측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4선 중진의 경력에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는 나 전 의원 입장에서는, 당심 1위임에도 불구하고 당 대표 불출마 압박을 받고 있는 현 상황이 위기이자 기회일 수 있다. 나 전 의원이 당권경쟁에서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지만 '윤핵관'으로 통칭되는 일부 당내 주류에 부정적인 당심, 그리고 총선 승리에 어떤 얼굴이 유리할까 고민하는 전략적 당심이다. 나 전 의원은 '반윤' 딱지를 붙여 자신을 공격하는 당내 비판에 맞서 자신을 '반윤핵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 윤창원 기자
당장 나 전 의원의 해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반윤의 우두머리'라며 비난에 나선 상황이기도 하다. 그는 페이스북에 "오로지 자기 정치만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장 대통령을 위하는 것처럼 고고한 척하는 행태는 친윤을 위장한 비겁한 반윤"이라며 나 전 의원을 살벌하게 공격했다. 당내에서는 "일개 원외위원장 주제에 대통령을 능멸한 것"이라는 신랄한 표현까지 나왔다. 수모에 가까운 십자포화에도 나 전 의원은 직접적인 대응은 삼갔다. 부위원장직을 요구한 적이 없고,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이용한 적도 없다는 '팩트 수정' 정도에서만 장 의원의 주장을 반박했다.
대통령실의 의중과 나 전 의원의 거취가 정리된 시점에서 남은 건 나 전 의원의 당권 도전 여부 뿐이다. 관건은 지지율이다. 나 전 의원이 윤심에 '맞서서' 당 대표에 출마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지지층이 이탈할 수 있다. 나 전 의원 측 복수의 관계자들이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누구보다 헌신할 것"을 강조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나 전 의원은 14~21일인 윤 대통령의 순방 일정이 끝나는 대로 출마 여부를 밝힐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윤 대통령의 순방 성과를 해치지 않도록 일정과 메시지 선택이 신중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당권 경쟁자인 안철수 의원은 '수도권 연대'의 일원인 나 전 의원의 출마를 독려하면서 '친윤 단일후보'로서 빠른 속도로 지지율을 높이고 있는 김기현 의원을 경계했다. 안 의원은 이날 강남을 당협 당원간담회에서 '김장(김기현장제원)연대'를 두고 "공천연대, 일종의 공포정치"라고 비판했다. "이리되면 수도권에서 표를 못 받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도 했다. 김 의원은 서울 송파을 재선출신의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를 캠프 선거대책위원장에 영입하고 15일에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만나는 등 확장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김 의원은 윤심을 내세운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도 "단 한번도 '친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친윤이 아닌 친민 후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