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4·3 정방폭포 위령공간 조성사업이 첫 삽을 떴다. 공사부지 바로 옆에 중국풍의 정자가 보인다. 고상현 기자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수백 명의 사람이 희생당한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유가족의 숙원 사업인 위령공간 조성 공사가 주민 반발로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첫 삽을 떴다. 1년여 만이다. 다만 중국과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서복전시관 공원에 조성돼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고개 든 4·3 혐오…우여곡절 끝에 '첫 삽'
당초 제주도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2억여 원의 예산을 투입해 서귀포시 자구리공원 25㎡ 부지에 4·3 위령공간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4·3 당시 인근 정방폭포와 소낭머리 등지에서 200여 명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도 70년 넘도록 안내판이나 희생자 추모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정방폭포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연결로를 설치하는 계획이었다. 특히 조형물은 '어두웠던 과거의 문을 열어 진실과 화해의 빛을 맞이해 희생자 넋을 기린다'는 의미가 담겼다.
공사는 지난해 3월 끝나야 했지만, 인근 주민과 상인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무기한 중단됐다. 지금은 철거됐지만, 당시 공사 부지 주변으로 '4·3위령비 설치 결사반대' 현수막 7개가 내걸렸다. 주민과 상인들은 추모 공간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고 관광객이 안 온다'며 반발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다른 부지를 찾아야 했다. 지난해 6월 자구리공원에서 200m 떨어진 서복전시관 주차장 화장실 바로 옆 공터를 새로이 선정했다. 하지만 유족과 시민들이 4·3희생자를 추모하는 곳인데 화장실 옆이라 냄새가 심하게 나는 등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무산됐다.
지난해 3월 자구리공원에 내걸린 반대 현수막들. 고상현 기자고심 끝에 제주도가 선정한 부지는 서복전시관 주차장 화장실 바로 옆 불로초공원이다. 이곳은 지난 2003년 중국과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서복전시관 내 공원이다. '2200년 전 진시황의 사자인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에 닻을 내렸다'는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현재 중국풍의 정자와 담벼락 사이로 기존 보행로 판석을 철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오는 3월 31일까지 끝낸다는 목표로 4·3 정방폭포 희생자 위령공간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또 반발했지만…"교육의 장 활용하자" 설득
우여곡절 끝에 4·3유가족의 숙원사업인 위령공간 조성사업이 1년여 만에 첫 삽을 떴지만, 이마저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동홍동 주민 설명회 자리에서 일부 주민이 또 반발한 것이다.
제주도에 따르면 지난해 말 동홍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주민 설명회에서 일부 주민이 "왜 우리 동네에 4·3 위령공간이 들어오느냐"고 고성을 지르며 반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이 "제주의 아픈 기억인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설득해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제주도 관계자는 "한 주민이 반대하시긴 했지만, 다른 주민들이 나서서 '혐오시설로 볼 게 아니'라고 그 주민을 설득했다. 그 이후에는 별다른 반발 움직임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4·3 당시 정방폭포에서 아버지를 잃고 평생 고아로 살아온 오순명(80)씨는 4·3 혐오 논란 끝에 1년여 만에 공사가 재개된 데 대해 안도했다. 오씨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번에 새로운 부지에 위령공간 공사가 시작돼서 감회가 깊다. 체 한 게 쑥 내려간 기분"이라고 말했다.
4·3 정방폭포 위령공간 조성사업 설계도. 제주도 제공"위령공간 조성사업 마무리되면…4·3공원으로"
아쉬움도 남는다. 4·3 당시 서귀포 최대 학살 터인 정방폭포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지만, 중국의 불로초 전설을 소개하는 공원 안에 있어서다. 예정대로 오는 3월 완공되는 4·3 정방폭포 위령공간에 가려면 중국풍의 입구를 지나야 한다. 또 주변 중국풍의 담벼락과 정자도 '옥에 티'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박모(65‧여)씨는 "4·3 당시 많은 분이 정방폭포에서 희생됐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데, 중국 역사를 소개하는 공간에 위령공간이 들어선 건 합당치 않다"고 말했다.
동홍동에 사는 백대출(58)씨는 "원래 자구리공원에 4·3위령공간을 조성하려다 문제가 생겨서 이쪽에 옮긴 거로 안다. 여러 번 공사 부지를 옮겨 다닌 것도 그렇지만, 중국 전시관에 들어선 것도 가슴이 아프다. 어렵게 첫 삽을 뜬 만큼 현재 공사가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오순명씨는 "어렵게 공사가 시작됐지만, 불로초공원 안이라 마음이 편치는 않다. 정방폭포 주변에 4·3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나 전시관이 없는데, 이번 위령공간 조성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불로초공원이 아니라 4·3의 아픈 역사를 소개하는 공원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복전시관 내 불로초공원에서 4·3위령공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고상현 기자한편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정방폭포는 4·3 당시 양민 248명이 단기간에 학살당한 서귀포시 최대 학살 터다. 유족에게 폭포의 아름다운 물줄기는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당시 인근에 서귀포경찰서와 서북청년단 사무실이 있어 피해가 컸다. 대체로 서귀포시 중문면,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주민들이 정방폭포에서 총칼 또는 죽창에 찔려 억울하게 희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