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만난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을 둘러싸고 한중간 신경전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측이 주중 한국대사에게 관련 발언에 대해 항의한 사실을 뒤늦게 공개하는가 하면, 관영매체를 동원해 연일 윤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중국 측이 '불에 타 죽는다'는 등 외교적 결례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교부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확전을 자제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중국 측은 오히려 사태를 더 키우려는 형국이다.
中 외교부 차관, 한국대사 불러 '엄정 교섭 제기'
이날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차관)은 지난 20일 '명령에 따라' 대만 문제에 대한 한국 지도자들의 잘못된 발언에 대해 정재호 주중 한국대사에게 '엄정한 교섭'을 제기했다.
엄정한 교섭 제기는 특정 사안에 대해 외교 경로를 통해 항의했음을 뜻한다. 또, '명령에 따라'는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등 굵직한 사안에 대한 항의에 나설때 사용한 표현으로 그만큼 중국 정부가 이번 사안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쑨 부부장은 정 대사에게 윤 대통령의 발언을 자세히 언급하며 "이 발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중국은 심각한 우려와 강한 불만을 표명한다"면서 "세계에 중국은 하나뿐이며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간 중국 측이 밝힌 입장을 반복한 뒤 "우리는 한국 측이 한중수교 공동성명 정신을 성실히 준수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며 대만 문제에서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정 대사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중국 측은 정 대사가 "(한국은) 줄곧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해 왔으며 이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고만 소개했다.
우리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 존중' 확전 자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공개된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와 관련해 "(대만해협에서의) 이런 긴장은 힘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중국 측은 발언이 공개된 당일에는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다가 다음날인 20일 왕원빈 외교부 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타인의 말참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외국 정상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비판 메시지를 냈다.
이에 우리 외교부는 같은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중국의 국격을 의심케 하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며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초치해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중국 정부 외교사령탑인 친강 외교부장(장관)이 직접 나서 "대만 문제에 대해 불장난을 하는 사람은 불타 죽을 것(玩火者, 必自焚)"이라며 상대국 정상에게 막말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냈다.
다만, 오는 24일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논란이 더 커지는 것을 우려해 우리 정부는 확전은 자제하는 모양새다. 우리 외교부 당국자는 21일 친 부장의 발언 이후 관련 질문에 중국의 외교적 결례에 대해서는 항의의 뜻을 밝히면서도 "우리 정부의 하나의 중국 원칙 존중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사태 더 키우는 中…한미 공조강화 견제 포석
그럼에도 중국 외교부가 이미 사흘이 지난 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나선 것은 중국 측이 이번 사안을 더 끌고 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중국 관영매체들도 이날 일제히 윤 대통령의 발언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이날 '한국 외교의 국격이 산산조각났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우리 외교부가 중국 측의 외교적 결례에 항의한 것을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윤 대통령의 발언을 '워싱턴에 대한 충성 표시'라고 주장하며 "미국이 유출한 기밀문서가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고위관계자 불법 사찰로 드러났을 때 정작 심각한 침해행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지 않고 왜 온순한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했는가"라고 반문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외국 구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즈 역시 전문가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 "한국이 자국의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 측이 이처럼 윤 대통령의 발언을 물고 늘어지는 배경에는 대만 문제를 가장 민감한 영토, 주권 문제로 인식하는 기조가 깔려있다. 여기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일 3국의 공조가 눈에 띄게 강화된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 역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관영매체들의 비판은 대만 문제에 이어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한 한미간 공조 강화 문제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오는 26일로 예정된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테이블에는 대만 문제 뿐만 아니라 안보.경제 분야 대중(對中) 견제 문제 등이 올라올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중국은 윤 대통령의 발언을 매개로 해당 사안에 대한 자국의 강한 반발 기류를 미리부터 확실하게 전달하려는 포석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