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제공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공공임대주택 임대료와 임대보증금을 5% 인상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재계약을 앞둔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서울시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는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보증금과 임대료를 5% 인상하기로 지난 4일 최종 의결했다. 이에 따라 오는 7월 1일부터 내년 6월 30일 사이 재계약을 앞둔 공공임대주택(주거환경·재개발·국민·매입·기타 임대주택 등)에 거주하는 임차인들의 임대보증금과 임대료가 5% 인상될 예정이다.
임대료 인상에 서민들 '한숨'…"더이상 사채 쓸 수도 없어"
일정한 수입이 없는 노인들은 임대료와 임대보증금 인상이 부담스럽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한 임대주택에 사는 문영례(82)씨는 "안 그래도 사채가 1600만 원 쌓여있는 상황에서 임대보증금이 인상되면 어디서 빚 얻을 데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적어도 보증금이 500만 원은 오를 텐데 노인네가 한꺼번에 그런 돈이 어디서 나오겠냐"며 걱정을 토로했다.
최근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문씨는 "보증금 인상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 쓰다 보면 몸이 떨리고 어지럽다"면서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려고 공공일자리를 겨우 구해서 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기 하남시 위례신도시의 한 임대주택에 사는 이남수(73)씨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별다른 직업이 없이 일용직 일을 하며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이씨는 "전기요금부터 난방비까지 모두 오르고 물가는 폭등해서 살기 힘든데 이래도 되냐"면서 "(임대료가) 인상되면 1년이면 임대료만 거의 20만 원이 오르고 보증금도 200만 원가량 오른다"고 한탄했다. 이씨는 "당장 대책이 없어서 부담이 큰데, 자녀들에게 손 벌릴 수도 없고 참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회초년생이나 다자녀 가구도 부담이 큰 건 마찬가지다. 송파구 오금동의 한 매입임대주택(보증금 1856만 원, 월 임대료 15만 원)에 살고 있는 사회복지사 김별님(29)씨도 인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대출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김씨는 "월급은 180만 원 그대로인데 지출이 늘어서 부담"이라며 "임대료·임대보증금 인상 소식을 듣고, 아직 사회초년생이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스럽고 막막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보증금만 100만 원가량 늘어날 것 같은데 어떻게 마련할지 아직 대책은 없고, 보증금 대출을 받았는데 거기서 추가 대출이 되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강서구 마곡동의 한 국민임대주택에서 18년째 다섯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하모(47)씨는 오는 11월 재계약을 앞두고 임대보증금 인상분을 마련할 생각에 걱정이 크다. 하씨는 "약 1억 3천만 원이었던 보증금이 약 700만 원 정도 오를 예정"이라며 "(SH는) 5%면 별로 안 된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 그게 아니다"고 말했다.
하씨는 "평소에도 (가계가)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우리한테는 너무 부담된다"며 "우리도 그렇고 내 주변도 다 (인상분 충당을 위해서는) 대출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SH·서울시 "인상 불가피, 법적 하자 없어"
스마트이미지 제공당장 인상분을 마련하기 어려운 임차인들에 대한 지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임대보증금 인상분에 대해 1년간 납부를 유예해 주겠다는 것 외에는, SH는 이번 인상 조치에 대한 별다른 후속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지만, SH와 서울시는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SH 관계자는 "(임대료 인상에 대한) 반대가 워낙 심해 그간 진행하지 못하다가, 올해 처음 서울시 조정위원회를 공식 구성하면서 전체 임대주택의 임대료를 인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그동안 임대료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는데도 SH가 제 역할을 못했다"며 "결국 임대료 조정 권한을 SH에서 서울시로 옮겨서 임대료를 인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SH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보증금·임대료를 인상했다. 지난해 4월 서울시의회에서 '서울특별시 공공주택 건설 및 공급 등에 관한 조례'가 개정되면서 임대료 조정 권한이 SH에서 서울시(서울시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로 넘어간 덕분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변 시세나 LH와 비교했을 때 SH 임대료와 임대보증금이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지속됐기에 인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민들 "충분한 협의 없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임대료 인상 과정에서 충분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서울 송파구 위례포레샤인 23단지의 박지선 임차인 대표회장은 "지난 1월 10일 서울시가 임대보증금 및 임대료 인상을 결정하고, 1월 27일 SH 이사회에서 통과됐지만 이 과정에서 임차인 대표회의와 입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는 단 한 번도 없었다"면서 "2월 중순에야 각 임대아파트 단지에 공문을 보내고 의견을 수렴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월 SH가 각 임차인대표회의에 보낸 '임대주택 임대료(임대보증금) 인상에 대한 임차인대표회의 안건 상정 및 협의 요청' 공문과 '임대주택 임차인대표회의 의견 업무협조 요청'을 살펴보면 "경영 악화로 인하여 부득이 임대보증금 및 임대료를 5% 인상하게 됐다",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 심의 결과에 따라 5% 인상 시행을 통보한다"고 적혀있다.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임대사업자는 임차인대표회의와 '임대료 증감'에 관해 '협의'해야 하는데, 협의를 거치기도 전에 '통보'부터 한 셈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특별법상 협의의 방법이나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만 협의하면 법적 하자가 없다"면서 "(임대료 인상이) 최종 의결된 때는 서울시 공공주택 임대료 조정위원회가 열린 4월 4일이고, '인상 통보'라고 공문에 적혔을 뿐이지 실제로 통보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번 임대료 인상은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호소한다. 특히 입주 조건에 소득 제한이 있는 주민들은 돈을 더 벌어 인상분을 마련할 수도, 가만히 있다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없는 모순에 빠졌다.
임대주택 주민 하모(47)씨는 "국민임대주택은 소득 제한이 있어서 월수입이 350만 원을 넘으면 퇴거 대상이다"며 "공식적으로 SH를 통해 인상 소식을 들은 것도 없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올려버리면 우리는 대책을 세울 수도 없어서 더 화가 난다"고 전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흔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5천 원, 만 원의 의미와 공공임대주택 임차인들이 생각하는 돈의 의미는 다르다"면서 "임대료 인상이 불가피하더라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임차인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충분한 설득을 거친 뒤 결정할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