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의 입구. 황진환 기자"보증금 돌려달라"는 요구에 "다음 세입자 구해오면 주겠다"는 집주인
"내 양심 속이고, 다른 사람을 이 집과 전세계약을 맺게 하면 저는 보증금 받고 이 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겪은 고통을 다음 세입자가 겪을 수 있는데 어떻게 소개할 수 있겠어요. 다른 공인중개업자들도 이런 집은 취급하지 않는대요."
신혼부부였던 A(37·여)씨 부부는 2020년 1월 인천 미추홀구의 한 빌라에 전세대출을 받아 신접살림을 마련했다. 공인중개업소도 대출은행도 모두 문제가 없다고 A씨에게 안내했다.
2년여 간 돈을 모아 생애 첫 주택을 분양받기 위해 이사를 결심한 A씨는 지난해 7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른 세입자를 데려오면 보증금을 주겠다"였다.
여러 핑계를 대며 보증금 반환을 미루던 집주인은 최근 연락이 끊겼고, 같은 주택 다른 집에서는 경매가 시작됐다는 안내문이 발송됐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면서 가계약했던 분양계약도 취소됐다.
전세대출 자금을 갚지 못하면서 분양대출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결국 A씨 부부는 지난해부터 이 집에 묶인 신세가 됐다. 보증금 반환은 크게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던 공인중개업소는 그 사이 폐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공인중개업소를 찾아가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두 "이런 집은 취급하지 않는다. 최우선변제금보다 적은 액수로 계약해야 하는 집"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A씨는 "보금자리가 안정되면 첫째 아이를 갖자던 가족계획도 무산됐다"며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집도 아기도 희망도 모두 사라졌다"고 호소했다.
같은 공동주택 입주자들 모두 보증금 못 받아…경찰 수사
결국 같은 주택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A씨는 이 주택 전체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인천 미추홀경찰서는 미추홀구의 모 빌라 세입자들이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받아 수사에 나섰다. 이들이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한 전체 보증금 규모는 수십억원에 이른다.
피해자들은 집주인이 전세로 준 집이 32세대에 달해 앞으로 고소인 수와 피해 규모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도 해당 피해 접수가 이어지고 있어 현재 피해자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는 10일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어지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주범과 공범에 대한 구속 수사를 비롯해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한 강력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잠적한 집주인 '건축왕' 일당과 연관…범죄단체조직죄 확대 적용해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을 수소문하던 A씨 부부 등 피해자들은 최근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와 만나 여러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 빌라의 집주인이 일명 '건축왕'으로 불리는 전세사기 건축업자 B(61)씨의 외5촌 조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이 집주인이 과거 B씨의 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는 10일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어지는 전세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주범과 공범에 대한 구속 수사를 비롯해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한 강력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A씨는 "세입자 대다수가 이제 시작하는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이었는데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집이 한순간에 지옥으로 바뀌었다"며 "다음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선 주범과 공범들이 은닉한 재산을 몰수해 피해자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건축왕 A씨와 공인중개사 등 그 일당은 국내 전세사기 사건 가운데 처음으로 범죄조직죄가 적용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수도권에 2700여채의 주택을 보유하면서 인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세입자들에게 받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돈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이 기소한 건축왕 일당의 전체 범죄 혐의 액수는 현재까지 공동주택 533채의 전세 보증금 430억원에 이른다.
"전세사기 수익이 처벌보다 크다면 처벌은 오히려 범행동기가 될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장은 "건축왕과 그 일당의 범죄가 우리 사회에 끼친 건 단순히 전세금을 받아 챙겨 돌려주지 않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며 "이들이 공인중개업자와 은행권 등과 짜고 세입자를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젠 그 누구도 전셋집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나아가 국가시험을 통해 배출된 공인중개업자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됐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안상미 대책위원장은 "이들이 무너뜨린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가장 확실할 방법은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는 것"이라며 "전세사기 범죄로 얻는 이익이 처벌보다 크다면 이는 오히려 범행 동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위원장은 또 "60명이 넘는 건축왕 일당 가운데 18명만 범죄조직죄를 적용받았다"면서 "바지 임대인까지 여기 포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미추홀구는 건축왕 일당으로부터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의 피해 사례가 잇따라 결과적으로 전세사기 특별법 제정을 견인한 지역이다. 현재 이 지역은 건축왕 일당의 범행 말고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전세사기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일에도 미추홀구 모 오피스텔 입주자 10여명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집주인을 고소해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또 오는 12일은 '건축왕' 일당의 전세사기 범행으로 피해를 입고 지난 5월 24일 숨진 네 번째 희생자 C(40대)씨의 49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