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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 급발진' 손해배상 확정 0건…법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

법조

    '車 급발진' 손해배상 확정 0건…법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

    편집자 주

    차량 급발진 사고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난제 중 하나입니다. 급발진이냐, 아니면 운전미숙이냐를 두고서도 공방이 오가지만 차량 결함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소비자에게 지운 현행법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지적이 쏟아지고 있죠. 차량 급발진이 인정돼 제조사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한 판결이 사실상 전무(全無)하다는 현실은 이러한 지적에 힘을 더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CBS노컷뉴스는 2회에 걸쳐 최근 급발진 의혹 재판의 흐름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단체가 '실체적 진실 파악'을 이유로 강하게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법원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 현장. 강릉소방서 제공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 현장. 강릉소방서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車 급발진' 손해배상 확정 0건…법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
    (계속)

    국내에서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차량 결함을 인정한 판결은 극히 드물다.

    일부 민·형사 소송의 경우 하급심에서 차량 결함이 인정된 판결이 있고, 또 그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지운 판결도 있지만 대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 판례가 확정된 재판은 사실상 없다.

    다만 최근 법원 재판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사고 차량에 대한 적극적인 감정 절차를 밟는 것은 물론 일부 재판부가 적극적인 '결함 추정'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 '결함 추정'… "상식적으로 그렇게 달릴 수 있나?"

    국내 급발진 의혹 관련 손해배상 재판 중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사건은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2018년 BMW 급발진 의혹 사망 사건'이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BMW 차량이 급가속한 직후 충돌, 추락해 탑승자 2명이 사망했다.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 차량.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 차량.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BMW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운전자 유족은 1심에서 패소했지만, 2심에서 이겼다. 당시 2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에 근거해 적극적인 '결함 추정'에 나섰다.

    제조물책임법은 '피해자가 정상적으로 제품을 사용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것'이란 점과 '해당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서 발생한 것' 등을 입증하면 제품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소비자의 입증을 토대로 결함을 추정하는 것이다.

    2020.8.11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 'BMW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소송 판결문 中 
    재판부
    "이 사건 사고는 A(사망한 운전자)씨가 정상적으로 이 사건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던 상태에서 제조업자인 피고(BMW)의 배타적 지배 하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결국 이 사건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라고 판단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는 위 사고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2심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뭐였을까. 재판부는 사고 당시 운전자가 비상등을 켜 주변에 위험을 알리며 갓길로 주행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과속 등으로 인해 과태료를 부과받은 적이 없는 운전자가 사고 당시엔 300m나 되는 거리를 200km/h의 속도로 계속 주행한 사실에도 의문을 가졌다. 결국 운전자는 정상적 운행을 하려 한 것으로 보이고, 이에 따라 차량 결함이 의심된다고 본 것이다.

    2020.8.11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 'BMW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소송 판결문 中
    재판부
    "이 사건 자동차는 사고 장소로부터 비교적 긴 거리인 약 300m 이전 장소부터 200km/h 이상의 속도로 고속 주행하는 것이 확인되는데, 위 주행 중에 다른 자동차들이 달리지 않는 갓길로 진행했다. 또 고속 주행 중에 계속해 비상 경고등이 작동되고 있었다. A씨는 사고 장소 이전에서는 80km/h 내지 100km/h 사이의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고, 사건 사고 이전에는 과속 등으로 과태료 등을 부과받은 사실도 없다"

    "피고(BMW)는 A씨가 사건 사고 무렵 조향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고,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지 않은 것에 비춰 보면 A씨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고 오히려 오인해 가속페달을 밟은 것으로서 정상적인 운행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상경고등이 작동된 채로 300m 이상의 거리를 갓길로 진행하고 있었던 사정에 비춰볼 때 고속 주행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운전자가 정상적인 운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량 엔진 상의 결함이 있을 경우 브레이크 페달이 딱딱해질 가능성도 있는 점 등에 비춰보면 브레이크 등의 미작동만으로 A씨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현재 이 사건은 판결에 불복한 BMW의 상고로 대법원의 판단을 받고 있다. 2심 재판부의 '차량 결함' 판단을 대법원이 확정할지 관심이 쏠린다.

    최근 형사 재판에서도 적극적 결함 추정으로 차량 결함을 인정한 사례가 나왔다. 물론 형사 재판과 민사 재판은 입증 책임 등 여러 차이가 존재하지만, 차량 결함을 추정해 재판에 넘겨진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역시 흔치 않은 판결이란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지난 6월 대전지법 형사5단독은 서울 소재 한 대학에서 발생한 '차량 사망 사고' 관련 형사 재판에서 "차량 결함 가능성이 높다"라며 운전자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20년 12월 B씨가 몰던 현대자동차 차량은 지하주차장을 나온 직후 과속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이후 피해자를 치어 숨지게 했다. 검찰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치사) 혐의로 운전자를 재판에 넘겼지만 재판부는 범죄에 대한 검찰의 입증이 부족하고, 또 차량 결함을 의심할 사유가 많다며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23.6.15 대전지법 형사5단독 '현대차 사망사고' 형사재판 판결문 中  
    재판부
    "교통사고분석서에 의하면 이 사건 차량은 지하주차장을 나온 지점에서 시속 10.5km의 속도로 우회전을 하던 도중 갑자기 속도가 시속 37.3km, 45.5km, 54.1km, 65.5km로 계속 증가하다가 시속 68km의 속도로 피해자를 충격했다. 이후에도 시속 68.3km로 보도블록과 가드레일을 충격했고 그 이후에서야 속도가 줄어들었다"

    "위 분석에 따르면 차량의 속도는 증가할 뿐 감속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렇다면 피고인이 약 13초 동안 보도블록, 화분을 충격하면서도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계속 밟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과실을 범하는 운전자를 쉽게 상정하기 어렵고 이와 같은 주행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가속페달을 계속 밟지 않는 이상 이뤄질 수 없는 주행으로 판단된다"


    운전 경력 30년의 운전자가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착각해 13초나 되는 시간 동안 계속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B씨가 몰던 차량의 이동 경로. 대전지방법원 제공B씨가 몰던 차량의 이동 경로. 대전지방법원 제공
    2023.6.15 대전지법 형사5단독 '현대차 사망사고' 형사재판 판결문 中  
    재판부
    "사고 당시 차량에는 B씨의 배우자와 자녀가 동승하고 있어 B씨가 의도적으로 비정상적인 주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지점①에서 지점⑥까지 계속 가속됐을 뿐 감속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여러 차례 차량의 브레이크등이 점등되기도 해 B씨가 계속해 가속페달을 밟았다고 보기 어렵고, 이 사건 차량의 결함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더욱이 B씨는 1991년 운전면허를 취득해 운전경력이 30년 이상으로 짧지 않고, 사고 당시까지 단 한 번의 교통 관련 수사나 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어 피고인이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밟았다고 예상하기 어렵다"

    "복잡한 사안이라 감정 필요"…적극 감정 나서는 재판부

    최근 일부 재판부가 급발진 의심 차량에 대한 적극적인 감정에 나서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차량 결함을 원고가 입증해야 하는 현행 법체계 안에서 원고들은 그동안 적극적인 감정을 요구해 왔지만, 제조사가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맞서면서 감정은 쉽사리 진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재판부에서 적극적인 감정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티볼리 급발진 의혹 사고'는 현재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에서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다. 강릉에서 60대 여성이 몰던 티볼리가 급가속한 뒤 추락했고 이 사고로 여성의 손자(12)가 숨졌다.


    이 재판은 지난 1월 접수됐지만 5월에나 첫 변론이 진행됐다. 재판부는 첫 변론 기일부터 "이 사건은 소장이 접수된 것이 1월이고 벌써 5월이 됐고, 그 사이 기일 통지를 했지만 피고 측에서 소송에 대해 뭔가 신속하게 대응을 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부분은 피고 측이 감수해야 한다"라며 "원고가 신청한 증거는 다 채택한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요구한 EDR(Event Data Recorder·사고기록장치)과 음향분석 등에 대한 감정신청을 채택했고, 이어 6월 27일 감정기일을 진행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가 맡고 있는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적극적인 감정이 이뤄지고 있다. 블랙박스 영상 감정을 시작으로 블랙박스 음향, EDR, 작동장치 감정 등을 채택해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특히 해당 재판부는 지난해 열린 첫 변론기일에서부터 "사안과 내용이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증거 조사 신청을 되도록 채택할 것"이라며 "채택하면 안 된다는 식의 의견보다는 감정이나 검증이 필요하다는 등의 방향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재판 진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재판부 재량에 의한 결정이란 점이다. 명확한 판례나 기준 등이 없다 보니 급발진 관련 소송의 진행 형태는 법원이나 재판부별로 천차만별이다.

    부산에서 급발진 의혹 사고로 일가족 4명이 사망한 '2016년 현대차 싼타페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는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하자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받겠다며 지난달 상고했다. 원고는 1심과 2심 재판부가 입증 책임을 원고에 과도하게 부담시켰고, 결함 추정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지 않다고 반발했다.

    원고 측은 "재판 과정에서 여전히 급발진을 발생시키는 결함에 대한 증명의 정도를 원고에게 과중하게 부담시키고, 결함의 추정을 위한 3가지 요건을 과도하게 엄격히 해석해 연속적으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라며 "다른 급발진 소송 원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입증과 증거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이에 대한 판단을 유탈하거나 신뢰하기 어렵다고 배척했다"라고 상고 이유를 밝혔다.

    결국 재판부 재량에 따르다 보니 급발진 관련 소송은 진행 과정은 물론, 결과까지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싼타페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을 변호하고 있는 하종선 변호사는 "대한민국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급발진 관련 소송에서 자동차의 결함에 대한 증명의 정도와 결함 추정을 위한 3가지 요건에 대해 명확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달라"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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