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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車 급발진' 손해배상 확정 0건…법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 ②'車 급발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디스커버리'가 끝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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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급발진' 의혹 사고와 관련해 손해배상 소송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개인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승소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급발진 의혹과 관련해 제조사의 손해배상이 확정된 판결은 아직 단 한 건도 없다.
현행법 체제에선 소비자가 차량에 결함이 있었음을 선제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개인이 관련 자료와 증거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제공하지 않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급발진 외에도 의료 소송, 국가 상대 소송 등에서도 이러한 '증거 편재'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변호사 업계를 중심으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소송 전 증거조사)' 도입 목소리가 커졌고, 법원도 내부적으로 부서를 꾸리고 내부 의견을 모으는 등 대응에 나선 상황이다. 법관들은 디스커버리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법원도 공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
소송에 있어 절대적인 것은 증명이다. 증명이 부족한 이상 법원은 이를 뛰어넘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제품에서 결함이 발생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소비자가 입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송에 나선 소비자들은 제조사에 여러 자료를 요청하지만, 제조사는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제출을 꺼리는 것이 보통이다.
급발진 소송을 포함해 의료 소송, 국가 상대 소송 등은 일반적으로 소송 관련 증거가 한쪽에 쏠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상대방이 여러 이유를 들어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이를 따로 구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관련 지식이 부족한 데다 자료까지 얻을 수 없다면 말 그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이 지난해 판사들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현직 법관들도 이러한 증거 편재 문제에 대해 상당한 공감대를 보였다.
4일 CBS노컷뉴스와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이 확보한 설문 자료에 따르면
'현재 민사소송제도에서 당사자가 자료 수집·확보에 어려움이 있고, 법원이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느냐'는 질문에 설문에 참여한 94%의 법관이 "공감한다"라고 답했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285명 중 3명에 불과했다.
현재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있지만 이 또한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재판부가 문서제출을 명령하기 위해선 소비자나 개인이 어떤 자료인지를 특정하고, 나아가 상대방이 이 자료를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입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입증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내지 않으면 이를 제제할 강력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의미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 것이 법정의 현실이란 지적이 다수다.
법관들도 '현재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당사자의 증거수집권을 보장하고, 증거 편재 현상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공감하는가'라고 묻는 질문에 86.2%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이어 현행 문서제출명령 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32.4%의 법관이 '위반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미흡하다'라고 답했다. 설문에 응답한 법관 19.3%는 법원의 소극적 제도 운용을 문제로 꼽았다. 문서제출명령에 대한 제재를 실제로 부과하는 사례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처럼 증거 편재 상황에서 진행되는 재판이 결국 여러 문제를 낳으며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상당히 높은 우리나라의 상소 비율이다. 소송 당사자들이 하급심에서 증거 확보가 되지 않아 충실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패소했다고 생각해 하급심 판결에 불복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법률심인 상고심은 대부분 법률적인 오류 등을 따질 뿐, 세부적인 사실관계는 구체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데도 무조건 3심까지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는 결국 소송 장기화와 증가, 그에 따른 재판부의 업무 부담으로 이어진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도입 목소리는 나오지만…법원은 신중
그러자 변호사 업계를 중심으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에 들어가기 전 양측이 서로에게 필요한 자료 등을 요구·공유하는 절차다. 소송에 돌입하면 관련 증거를 다 내놓아야 하는 터라 소송에 앞서 합의에 이르는 경우도 잦다. 우리나라 사법 현장에 맞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목소리는 2010년대 들어 꾸준히 나왔지만 아직까지 논의 단계 수준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2019년 미국에서 벌어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이었다. 당시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자신들의 인력을 빼가는 방식으로 기술을 탈취했다고 주장했는데,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 법정에 소송을 냈다. 증거확보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는 미국을 택한 것이다.
미국 재판부는 2020년 2월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조기 패소' 판결했다. SK이노베이션의 증거 인멸 행위가 적발됐다는 이유에서였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사건 관련 증거를 훼손하는 경우 강력 처벌하는 조항이 있다. 당시 재판부는 "증거인멸과 포렌식 명령 위반에 따른 법정 모독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상황에 적합한 법적 제재는 오직 조기패소 판결뿐"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법원도 디스커버리 제도와 같은 방식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에 큰 공감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행정처가 이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85.9%의 법관이 공감한다고 밝혔다. 전체 응답자 285명 중 284명이 답했고, 244명이 공감한다고 답했다.
다만 국내 도입 여부를 두고는 법관들은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부정적 응답이 51.9%에 달했고, 공감한다는 답변은 34.4%에 그쳤다.
소송 제기 전 증거조사 제도에 공감한다고 응답한 법관들의 답변을 보면
△소송 제기 전에도 당사자가 충분한 증거 수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25.7%) △불필요한 소송을 줄일 수 있다(21.8%) △민사사건의 증거수집을 위한 형사 고소·고발을 줄일 수 있다(19.1%) △본안소송을 담당하는 법원이 보다 효율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다(17.1%) 순이었다.
반면 더 많았던 반대 응답자들의 답변을 보면 △소송 제기 전에는 쟁점이 부각되지 않고, 사실에 관한 다툼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27.7%) △소송 제기 전 증거조사 신청의 남용으로 당사자 등이 고통받을 수 있다(23.9%) △법원의 업무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18.6%) △증거조사 담당 법원과 본안 판단 법원이 분리되는 것은 직접주의에 반할 우려가 있다(16.0%) 순이었다.
실제로 산업계를 중심으로 디스커버리 제도가 남용될 경우 기업체 등의 산업기밀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송에 앞서 또 하나의 절차가 생겨 경제적 부담 요인이 늘어나는 것인 만큼 소송 당사자 간의 경제력 차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제기된다.
법원은 2021년 11월 디스커버리 연구반을 꾸려 논의에 들어갔다. 지난해 문서제출명령 제도 개편과 증언 녹취 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다만 소송 제기 전 증거조사 제도 도입에 대해선 '당사자들의 경제적 부담 가중', '신속한 재판 진행을 저해하고 직접주의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등의 이유로 부정적 입장을 내놓았다.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 등 11명이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있다.
법원행정처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관련 법률안이 국회에서 추가로 논의되는 경우, 우리나라 소송 현실에 맞는 적절한 내용으로 입법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