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흉기 난동' 장소로 지목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 인근에서 경찰들이 순찰을 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서울 신림역과 경기도 분당 서현역 칼부림 사건 이후 '살인 예고 글'이 연이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라오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경찰특공대 등을 투입해 치안을 강화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원인분석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 2000년대부터 '묻지마 살인' 꾸준히 발생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빈번해질 조짐을 보이는 지금의 한국은 20년전 일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무차별 흉기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2001년 오사카의 이케다 초등학교에서는 한 30대 남성이 흉기 난동을 벌여 초등학생 8명이 살해되고 15명이 크게 다쳤다.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에서는 한 20대 남성이 트럭을 몰고 행인에게 돌진한 후 칼부림을 저질러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 2016년 사가미하라에서는 한 20대 남성이 장애인 시설에 난입해 흉기를 휘둘렀으며 2021년 도쿄 전철에서는 한 20대 남성이 칼부림과 방화를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특정 대상이나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벌어진 '묻지마 살인'이다.
NHK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일본의 묻지마 범죄 건수는 2021년부터 2022년 초반까지 15건 이상으로 급증했다. 매년 평균 범죄 건수가 3~4건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크게 증가한 수치다.
경제난·고립 등 겹치면서 청년 분노 누적… '묻지마 살인'으로 표출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 연합뉴스일본 법무성이 2000년부터 10년간 발생한 52건의 묻지마 사건을 조사한 연구를 보면, 묻지마 사건 범인 중 범행 동기로 '자신의 처지와 현상에 대한 불만'이라고 응답한 인원이 절반 가까이 달했다. 또 범인은 모두 39세 이하로 다른 사건 대비 연령이 낮았으며, 범행 당시 친밀한 친구가 있다고 응답한 범인은 3명에 불과했다. 일본 법무성은 묻지마 사건 범인의 특징적인 경향으로 부족한 교우 관계, 무직·무수입 등 생활의 어려움을 꼽았다. 버블 경제 이후 이어진 장기간 경제 침체로 사회적 고립 등 문제에 처하는 청년층이 증가하며 사회에 대한 분노가 범죄로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묻지마 사건의 범인들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신림역 사건의 가해자 조선(33)은 "내가 불행해서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취지로 진술하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조씨는 무직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현역 사건의 가해자 최원종(22)도 특목고 진학에 실패한 자신을 향한 좌절로 조현성 인격장애를 겪으며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등 사회적 고립 상태에 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인터넷에 묻지마 살인 예고글을 올렸다 검거된 이들 중 다수는 10~30대 남성들이다.
서울시의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의하면 서울 청년 중 고립·은둔 비율은 4.5%로, 이를 서울시 인구에 적용하면 최대 12만 9천명으로 추정된다. 김도우 경남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사회 불만자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막연한 분노가 생겼고 이것이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상연 경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비해 적극적으로 대인관계를 맺으며 불만을 해소했다"며 "그러나 최근 청년들이 대인관계를 맺는 방식들이 정적으로 바뀌며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 "본인을 지지하는 인적 자원이 없는 경우 여러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분노가 누적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묻지마 범죄 대응할 '근본적인 해결책' 필요
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묻지마 범죄에 대비해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아키하바라 사건 이후 총포도검법 개정을 통해 칼날 길이 5.5cm 이상 대거 나이프 등 양날형 검 소지를 금지했다. 또 청년층 고립이 묻지마 살인을 유발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자 2021년 고독·고립대책 담당상을 신설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에도 지난달 23일 간사이공항행 전철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지는 등 묻지마 범죄가 계속 이어졌다. 일본 경찰청이 발표한 2022년 치안 관련 설문에 따르면 60% 이상의 응답자가 '지난 10년간 치안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또 치안 악화를 느꼈을 때 떠올린 범죄를 묻는 질문에 '무차별 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79.1%에 달했다.
한국에서도 묻지마 살인에 대응할 대안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상연 경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단기적 처방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며 "소외된 젊은층의 관리·지원에 대한 논의를 통해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사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도우 경남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 청년 실업, 펜데믹 등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20대·30대 남성들이 복지 영역에서 제외돼 있다"며 "사회적 고립은 결국 사회환경적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20대·30대 남성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불만 표출자들이 조기에 발견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확충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