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영동대로 복합개발 내 지하차도 설치와 동부간선도로·경부간선도로 지하화 등 대규모 지하차도 조성 사업이 줄을 잇는 가운데 도로의 지하화가 재난 대응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특히 집중 호우로 인한 지하공간 내 인명사고가 연례 행사처럼 반복되면서 기존 방재 대책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정부와 지자체는 기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지하차도 조성 사업에서 설계 지침·방재 기준 등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지만, 예측 범위를 크게 벗어난 기상 이변 탓에 현재의 재난관리 체계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하차도 설치를 재검토하는 등 시민들의 우려를 근본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후 위기 시대' 재난 사고로 불안감↑
최근 기후 변화로 기존 장맛비와는 다른 기록적인 폭우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상청은 올해 장마가 누적 강수량 역대 3위, 일평균 강수량 역대 1위 등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 채 종료됐다고 밝혔다.
앞서 7월 서울 동작구에 내린 폭우에 '극한 호우' 긴급재난문자를 처음 발송한 건 작금의 기후 위기를 방증한다. '극한 호우'는 1시간당 50㎜, 3시간당 90㎜ 이상' 등 2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경우 기상청이 행정안전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재난문자를 발송할 수 있도록 지난해 관련 법규가 마련됐다.
심화하는 기후 위기 속에 침수로 인한 인명사고는 해마다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도 청주 궁평2지하차도에서 14명이 숨졌다. 지난해에는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포항 인덕동 한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주민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앞서는 부산 초량동과 대전 판암동 지하차도가 침수돼 총 4명이 목숨을 잃었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4건과 2015년 3건에 그쳤던 지하차도 침수사고 발생 건수는 △2016년 8건 △2017년 24건 △2018년 10건(1~7월 기준) 등으로 집계돼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하차도 조성 사업' 우려 목소리 증폭
지난 7월 16일 미호천 제방 유실로 침수된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서 군 장병들의 배수 작업과 동시에 119 구조대원들이 버스 인양 뒤 실종자 수색을 이어가고 있다. 오송=박종민 기자궁평2지하차도 참사를 계기로 영동대로 복합개발 내 지하차도,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경부간선도로 지하화 등 현재 계획된 대규모 지하차도 조성 사업의 안전 대책에도 관심이 모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에 기본 계획이 수립된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사업은 영동대로 지하에 GTX 등 대중교통 복합환승센터와 상업시설 등을 조성하고, 지상을 녹지광장으로 변모시키는 사업이다.
해당 사업에서 침수 등 안전 이슈가 불거진 건 지상광장을 만들기 위해 480미터 길이의 대형 지하차도 설치가 예정돼 있어서다. 서울시는 도심광장 효용성과 도시경관 등을 고려한 최선의 계획이라고 강조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해당 부지는 최근 감사원에서도 강화된 설계기준으로 사전 침수 대책 등을 수립하도록 권고했듯이 주변보다 지대가 낮아 침수 위험성이 상존한 지역으로 꼽힌다. 지하차도가 완공되면 시간당 최대 6천여대의 차량이 통과하고, 교통 이용객이 하루 6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침수 등 재난 발생 시 대형 참사로 번질 위험이 매우 높다.
오는 2028년 개통을 목표로 올해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는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사업도 주목받고 있다. 동부간선도로는 궁평2지하차도처럼 하천변인 중랑천 인근에 위치해 있다. 중량천변은 대표적인 상습 침수 지역이다. 올해도 집중 호우로 중량천 수위가 상승하자 동부간선도로 양방향 전체 구간이 전면 통제됐다.
경부고속도로 지하화 사업 중 하나인 경부간선도로의 지하화도 추진 중이다. 양재부터 반포에 이르는 6.9㎞ 구간에 중심도 중심도 지하도로를 설치하고 지상에 도로와 공원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내 최대 통행량을 보이는 만큼, 침수·화재·교통사고 등에 철저한 방재 대책이 요구된다.
지하차도 건설 '전향적 접근' 필요
정부와 지자체는 현재 추진 중인 지하차도 조성 사업은 타당성 조사·설계 기준 강화 등 안전 대책을 마련해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뉴노멀이 된 상황에서 빈도 개념 등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 방재 성능 목표와 설계 기준 상향 등 대책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과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등은 '200년 설계빈도'가 적용됐다. 설계빈도란 일정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의 강수량을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과거 기록상 200년 빈도에 해당하는 폭우도 근래에는 1년 빈도일 수 있다. 예외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는 과거에 통용되던 기준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폭우로 인해 차량이 침수돼 있다. 류영주 기자실제 지난해 8월 서울 동작구에는 기상관측 이래 최대 폭우인 500년 빈도에 해당하는 시간당 141.5㎜의 비가 내렸다. 강남구에는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사업의 200년 설계빈도에 육박하는 시간당 116㎜의 비가 쏟아졌다.
이에 따라 지하차도 조성 사업의 원점 재검토 등 전향적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하차도 내 사고는 지상에 비해 큰 규모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고, 침수뿐만 아니라 화재·지진·테러 등 여러 재난 사고에도 취약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교통·재난안전 분야 한 전문가는 "침수 등으로 인한 재난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지하공간 활용을 검토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안전 중시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