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윤창원 기자정부가 2024년도 예산안에서 연구개발(R&D) 분야를 대폭 삭감해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당장 올해 기관운영비 삭감 지시까지 내려져 과학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연구자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과학계 단체들은 공동 성명을 내고 집단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내년 R&D 예산 삭감 충격 속 올해 '기관운영비'도 삭감?
5일 CBS노컷뉴스가 입수한 자료를 종합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올해 기관운영비 삭감 지시를 내린 뒤 이에 대한 삭감안을 받았다. 이르면 이번 주 안에 과기부는 출연연 실무자들과 삭감안을 협상해 이를 확정 지을 방침이라고 한다. 내년도 R&D 예산안이 대폭 삭감돼 충격에 빠진 과학계는 당장 올해 기관운영비 삭감 지시까지 내려오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 됐다.
통상 출연연 기관운영비는 NST 이사회를 열어 승인 받는다. 이사회에는 과기부 차관과 기획재정부 차관,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등이 당연직 이사로 참석한다. 이사회를 통해 올해 초 편성된 기관운영비 액수는 국가녹색기술연구소(녹색연) 이 16억 3천만원, 한국전기연구원(전기연)이 89억 1700만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에너지)이 146억 6200만원이었다. 각각 4억 3600만원, 11억 8300만원, 18억 8800만원 삭감하라고 요구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삭감률만 26.7%, 13.3%, 12.9%다. 올해 3월 과기부 차관·기재부 차관이 참석한 이사회 승인까지 받은 내역이었지만, 6월 말 R&D 예산이 '카르텔'로 지목 받던 시점에 기관운영비도 삭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어떤 대형 연구시설은 운영이 안 돼 쉬어야 할 것 같다는 데도 있고, 또 다른 곳은 한국전력에 연체 관련 문의를 했다고 한다. 3개월 연체를 하면 전기를 끊겠다는 답을 듣고 어떻게든 버텨 11월, 12월에 연체해 1월이 되면 내년도 예산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과기부 관계자는 "작년에 공공기관 운영위원회에서 올해 경상비 지출 규모를 3% 삭감하라고 모든 공공기관 공통으로 내려왔다"면서 "출연연도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이를 지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R&D 예산 대폭 축소→연구기관 '유탄'…"숨만 쉬라는 건가"
내년 정부 R&D 예산은 1964년 정부 통계 작성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든다. 지난달 29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내년도 총지출 예산안은 656조 9천억원으로 올해 본예산 대비 2.8% 증가한 가운데 내년 R&D 예산은 25조 9천억원 규모로 책정됐다. 올해 31조 1천억원 대비 16.6% 줄어 정부 예산 12개 분야 중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정부 R&D 예산은 과기부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에 올려 결정하는 주요 R&D 예산과 기재부가 심의하는 일반 R&D 예산으로 구성된다. 주요 R&D예산이 전체 정부 R&D 예산에서 80%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미 올해보다 내년 예산은 13.9%(3조 4500억원)삭감됐고, 여기에 기재부 일반 R&D 예산까지 합쳐 봤을 때 16.6%(5조 2천억원)이 줄어든 셈이다.
당장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이 유탄을 맞았다. 출연연 내년 주요 사업비 예산안은 올해 대비 25.2%나 삭감됐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분석에 따르면, 내년 NST 산하 25개 출연연 주요사업비는 총 8858억 8300만원으로 책정됐는데, 이 금액은 올해 출연연 주요사업비 예산인 1조 1847억 7100만원 대비 25.2% 줄어든 것이다. 주요 사업비는 전체 출연연 예산에서 순수 연구개발(R&D) 활동에 쓰는 예산이다. 정부가 밝힌 주요 사업비 삭감 규모 17.5%보다 더 높은 삭감 비율이다.
제동국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노조위원장은 "실제 현장으로 내려오면 인건비 등은 삭감할 수가 없어서 전체 예산 삭감은 오롯이 연구비 삭감으로 이어진다"면서 "연구비가 실제로는 30~80% 가까이 쪼그라들 수 있다. 이럴 경우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명분 없는 '묻지마식' 삭감 행태, 과학계 들끓게 해
대폭 삭감된 액수도 문제지만, 명분 없는 '묻지마식' 행태가 과학계를 더 들끓게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말 R&D 예산을 '카르텔'로 지목하면서 두 달 만에 예산안이 완전히 새롭게 짜여지는 바람에 어떤 연구기관의 예산이 어디서 얼마만큼 왜 삭감됐는지 잘 몰라 대혼란에 빠졌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예산은 상황이 어려우면 깎일 수 있지만, 예산 감축의 명분이 없다는 게 문제"라면서 "중요한 예산들을 자르는 과정도 실망스럽고 과학계에 이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참담하다"고 지적했다.
이어확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카르텔이라고 지목했으면 그 부분을 도려내야지,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부분들을 칼질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 수석부위원장은 특히 "명분에 따른 삭감이 아니라, 톱다운 방식으로 삭감 논리를 개발해서 알아서 삭감하라고 '던지기'를 하고 있는 행태가 문제"라면서 "전 과학계가 정부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전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공동 대응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와는 전혀 다른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당혹스럽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출연연 연구자는 "미국은 국가R&D 투자를 5년, 10년 중장기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대형 프로젝트만 선별하고 키운다면 기초연구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이공계 학부에 재학 중인 대학생은 "우리나라 인재들이 왜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선택하지 않고 다 의대로 가는지 알겠다"면서 "예산을 이렇게 난도질 해 놓고 '선택과 집중', '젊은 과학자 지원 확대'를 하겠다는 정부의 행태가 딱 눈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