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간첩단 사건' 연루자. 연합뉴스형사 법정에서는 전직 대통령도, 대한민국 최고 부자도 모두 같은 '피고인'입니다. 하물며 우리같은 평범한 국민들은 피고인석에 서면 눈가가 미세하게, 때로는 파르르 떨릴 정도로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생년월일 등을 묻는 '인정신문'부터 답변을 거부해 지엄한 재판부의 심기를 편치 않게 한 피고인들이 있습니다. 재판부는 다소 당황한 듯 "본인은 맞죠?"라고 물으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창원간첩단 사건'의 피고인들이었습니다. 이번주 법정B컷은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두고 대법원에 재항고까지 하면서 넉달 넘게 지연된 '창원간첩단'의 재판 소식을 전합니다.
강압수사 주장하며 입 다문 피고인들…재판부도 당황
가까스로 개시된 창원간첩단 사건의 첫 공판 법정.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습니다. 피고인들이 소속된 '자주통일 민중전위'(자통)을 비롯한 주변 관계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거든요. 응원 내지는 격려를 하러 온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비좁은 법정에 너무 많은 인원이 몰린 탓에 순번을 정해 법정을 오가기도 했습니다.
'창원 간첩단 사건' 연루자들. 연합뉴스창원간첩단은 총책 황씨와 정씨, 성씨, 김씨 4명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에 대한 충성결의문을 제출하고 공작금으로 7천달러(약 900만원 상당)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북한에서 지령문을 받아 반국가단체인 자통을 꾸려 국내정세를 수집하며 반정부투쟁을 벌인 혐의인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집회도 그중 하나입니다.
검찰은 이 '자통'을 북한 문화교류국의 하부 조직으로 보고 범죄단체로서 기소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900만원으로 무슨 공작을 벌일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수사는 초반부터 거칠었고 집요했습니다.
피고인들은 변호인 없이 국정원 신문을 받았다고 했고, 수사관으로부터 "우리 총 들 수 있습니다"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강제 구인 과정에서 상해를 입었다고도 합니다.
유무죄 여부를 떠나 엄연히 '미란다 원칙'이 있고 진술거부권이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자신들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당했다고 느낄 부분입니다. 그런 데다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했다가 법원으로부터도 번번이 거부당했으니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처음부터 침묵 시위를 펼칩니다.
2023. 8. 28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 창원간첩단 공판 中 |
재판부: 황○○씨,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황씨: 진술 거부합니다.
재판부: 본인은 맞나요?
황씨: 네.
재판부: 직업은요?
황씨: 다 거부합니다.
재판부: 황○○ 본인은 맞고요? 검사님, 이 분 황○○씨 맞나요?
검찰: 네.
재판부: 정○○ 피고인, 직업은요?
정씨: 답변을 일체 거부합니다.
재판부: 본인은 맞나요?
정씨: 네.
재판부: 성○○ 피고인?
성씨: 저도 다 거부합니다.
재판부: 김○○ 피고인,
김씨: 진술을 거부합니다.
재판부: 본인은 맞으시죠?
김씨: …
재판부: 본인이 맞는지 아닌지도 (답변을) 거부하시는 거예요? 대답 안하세요?
김씨: …
재판부: 검사님, 김○○ 피고인 맞나요?
검찰: 변호인에게 먼저 물어보십시오.
재판부: 변호인 어떤가요? 변론하러 오셨잖아요.
변호인: …
재판부: 아무도 대답을 안 하시네요? 김○○로 인정하고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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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인정신문이 끝나자 검찰은 이들의 혐의를 하나하나 읊었습니다. 검찰 설명만 들으면 정말 어마어마한 혐의입니다. 이에 대해 변호인은 검찰이 수집한 증거가 위법하다고 맞섰습니다. 또 믿을 만한 증거도 아니라고 했고요.
2023. 8. 28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 창원간첩단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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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황○○은 2016년 3월 캄보디아서 공작원과 수신호로 상호 인식하고 북한 문화교류국 직원과 회합했습니다. 그중 박○○는 이미 대법원 판결을 통해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자입니다. (중략)
2019년 7월 정○○이 캄보디아에 다녀온 뒤 회합 과정을 보고받고, 북한 지령과 관련해 막스 레닌 사상 보고 관련 논의하면서 김정은에 대한 충성결의문을 작성했습니다. 그후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미화 7000달러를 받고 국내에 입국했습니다.
변호인: 이사건 공소장에 의하면 '자통'은 소위 반국가세력으로 검찰은 범죄집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창원간첩단은 계속성도, 통솔체계도 못갖춰 범죄집단에 이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서 황○○, 정○○, 성○○이 해외에서 만난 사람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할 증거가 없습니다. 21년 전에 경비초소에서 근무한 탈북자 박○○의 진술 뿐입니다. 만난 사람이 북한인이라는 사실, 만난 목적이 지령 수수 목적이라는 것 모두 입증되어야 합니다.
제출된 증거 중 해외에서 수집한 증거는 모두 국제사법공조와 적법한 압수수색 절차를 거치지 않은 위법 증거입니다. 국정원 수사관이 숙박업소 특정 객실에 손님으로 가장해 가서 내부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숙박업소 내의 물건이라 영장 없이 압수수색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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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모두 열변을 토해냈는데요.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고 돈도 받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혐의는 사실이라면 중대한 범죄입니다. 반성하는 태도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수사당국이 위법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물리적 압력을 가해도 될까요?
혈액암에 척수염, 딸 결혼식까지 등장한 보석 심문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창원간첩단 공판은 구속기한 내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빠듯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두번째 공판에서는 피고인들의 보석 여부, 그리고 증인으로 출석한 국정원 직원의 증언 방식을 놓고 양측이 또 실랑이를 벌였는데요.
재판부는 검찰에 보석 여부에 대한 의견과 혐의를 구분해 말하라고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보석을 허가할 만한지 독자 여러분들도 직접 판단해 보시죠.
2023. 9. 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 창원간첩단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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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 측 변호인: 이미 유력언론들에 의해 실명과 거주지, 혐의 사실 상당 부분이 보도됐습니다. 주변에서 간첩으로 낙인 찍혔고 가족들도 주거지 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피고인 수사는 7년 이상 강도 높게 진행됐습니다. 감청도 이뤄졌습니다. 개인 사정도 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에 딸이 결혼합니다. 피고인이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할 수 있도록, 혼주석에 앉을 수 있도록 보석을 허가해 주십시오.
정씨 측 변호인: 피고인의 경우 미성년 자녀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미성년 자녀들은 어머니의 돌봄이 전적으로 필요한 나이입니다. 미성년 자녀를 두고 도주 우려가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현재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양육을 위해 보석을 허가해 주십시오.
(성씨와 김씨는 건강을 사유로 보석 요청)
검찰: 보석 관련 피티(프레젠테이션)에 앞서 추가 구속영장 발부 필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재판부: 그 부분 반론 제기할 것 아니잖아요. 보석허가여부에 대해 (말씀하세요).
검찰: 피고인들은 범죄집단을 조직해 북한의 지령을 직접 받아 노조와 시민단체에 침투해 조직원을 포섭하고 의식화 활동을 전개하고 북한에 보고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질서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합니다… (중략) 피고인들은 북한 김정은을 절대적으로 추종한다는 규약을 직접 하달받았고…
재판부: 지금 보석에 관한 의견 진술인데 이렇게 자세하게 할 일이에요? 범죄 중대성에 대해 간략히 하셔야지. 공소장 세부사항을 얘기하시는데요.
검찰: 범죄 중대성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재판부: 지나치게 자세한 것 같아요. 제목 위주로, 구두로 설명하시죠. 읽지 마시고.
검찰: 인정신문도 거부하는 등 피고인들은 반성의 태도 없이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주장만 반복합니다. 사법 질서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피고인 황씨는 딸의 결혼을 빌미로 보석을 주장하고 있으나 구속집행정지 등으로 충분히 참석 가능하므로 보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질병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는 구속심문 및 적부심에서도 주장했다가 기각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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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증인에 가족도 퇴장…"벽만 보고 신문합니까"
보석 심문에 이어 이날은 국정원 측 증인의 신문 방식을 두고도 양측은 옥신각신 했습니다. 국정원 직원 '김모씨'라고 하는데 피고인 측에선 증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또 국정원 소속이라는 이유로 차폐막을 설치하고 비공개 신문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피고인 측은 반발했습니다.
2023. 9. 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 창원간첩단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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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검찰 측에서 국정원법과 형사소송법에 따라 증인신문에 있어 비공개 절차 내지는 차폐 시설 설치를 요청했습니다. 국가안전보장 질서 등에 대한 우려가 있어서 비공개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 증인신문은 모두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현재 재판 당사자와 교도관, 변호인 외 모두 퇴정해 주세요.
변호인: 재판장님, 이의 신청합니다. 국정원 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공개 전환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재판정에서 '김모'라고 하는 경우 심각하게 변론권이 침해됩니다. 국보법 재판은 영원히 비밀재판으로 하게 됩니다. 종북 공안몰이가 횡행하는 시점에, 파시즘 아래에서나 있는 그런 재판입니다. 가족들조차 보지 못한다는 겁니까.
이 재판이 파행적인 재판으로 남지 않도록 비공개 결정을 철회해 주시고 차폐막 설치도 철회해 주세요. 증언만이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증인의 얼굴을 보고, 표정과 몸짓도 중요한데 아무 것도 못보는 상태에서 벽만 보고 신문해야 하나요? 반대신문권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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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소속 직원이나 국정원 측 증인을 신문할 때마다 반복되는 공방입니다. 의문은 남습니다. 국가안보 등의 이유로 비공개 재판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미 혐의가 대서특필되다시피 한 이 재판에서까지 비공개를 해야 했을까요? 국정원 소속 직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고 차폐막까지 설치했는데 말입니다.
창원간첩단의 세번째 공판은 11일 열립니다. 이날도 비공개 재판이 계속될까요? 피고인 신문에서 피고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할까요?
창원간첩단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으로 소란스러운 요즈음 머리 속을 스치는 역사 속 한 장면이 있습니다. 매카시즘 광풍이 휘몰아쳤던 2차대전 전후 미국입니다. 미 의회에 비미(非美)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가 설치됐고 유명 언론인과 작가, 배우, 과학자들까지 '소련 동조자'로 낙인 찍혔죠. '두더지(mole)'라고 불린 진짜 간첩도 있었고 억울하게 직업과 삶의 기반을 뺏긴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때아닌 '이념 전쟁'을 시작한 요새 우리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죠.
이들 희생자 중에 서부영화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리오넬 스탠더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비미활동위원회에 출석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나는 기쁘게 대답할 겁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인식하고 있었고 내가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한 모든 말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대로 정부와 검찰이 한 편을 먹고 "진보 민중운동 진영에 종북세력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피고인 신문을 앞둔 지금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래 전 서부영화 배우가 보여준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법 질서가 요구하는 자세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