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피고인에게 질문합니다.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주행 시도를 할 건가요?"
특수상해 및 모욕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이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이는 검찰도, 재판장도 아닌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배심원이었다.
17일 오전 서울남부지법 406호 대법정. 이날 8명의 배심원(예비 배심원 1명)이 자리한 '국민참여재판(국참)'이 열렸다. 국참에서는 배심원이 형사 재판에 참여해 재판부에 사실의 인정, 양형 등에 의 의견을 제시한다.
이날 재판 피고인은 박모(38)씨. 검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9월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오토바이가 다니는 길이 아니다'라며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요구하는 피해자에게 욕을 하고, 오토바이로 피해자를 들이받은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이날 배심원들이 박씨의 유·무죄를 따지는 배심원석에 앉기까지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법원이 보낸 안내문을 받고 실제 이날 법원에 출석한 배심원 후보자는 30명 남짓. 이날 오전 10시부터 검사와 변호인은 이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가며 고르고 고른 최종 배심원 8명을 선정했다.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는 "전과가 있는 사람을 가중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전과가 없다면 선처해야 하나요", "동일한 사건에서 자백하는 사람과 범행을 끝내 부인하는 경우가 있다면 선고형의 차이가 있어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이 던져진 것으로 전해졌다.
선정된 배심원들은 재판 초반에는 법정이 어색한 듯 긴장한 눈치였다. 이를 눈치챈 재판장은 재판 진행 절차와 행사 재판에서의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상세히 설명하며 재판을 끌어갔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배심원단은 안경을 고쳐 쓰는가 하면, 겉옷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려가며 진지해졌다. 피고인 신문이 진행될 때에는 박씨의 표정 변화까지 포착하려는 듯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다.
18일 서울 남부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됐다. 남부지법 제공이날 재판에서는 피고인의 오토바이가 실제로 피해자를 충격했는지와 피고인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무엇보다 박씨에게 특수상해 혐의를 물으려면, 그가 피해자가 오토바이에 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감수하거나 이를 의도해서 오토바이를 몰았는지, 즉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입증해야 했다.
PPT까지 준비해 온 검찰은 "고의에는 '피해자를 치겠다'는 확정적 고의도 있지만, '치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도 있다"며 일반 시민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법률 용어부터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의 무릎 상처 사진 등을 제시하며 "이는 CCTV처럼 피해자가 뒤로 넘어져서는 생길 수 없는 상처다. 피고인 박씨의 오토바이가 충격해 생긴 상처"라고 주장했다. 이어 "피해자가 넘어지기 직전 오토바이 앞부분이 살짝 들리는데, 이는 피해자 발등을 역과한(밟고 지나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도로교통공단의 감정서를 들었다.
피고인 박씨 측도 감정서로 맞받았다. 사설 기관이지만 영상분석 전문 업체 소속이라며 각종 수사 기관의 자문을 맡고 있다는 분석가의 이력까지 소개했다.
변호인은 "CCTV 영상을 보면 피해자가 오토바이 진로 방향으로 이동했다"며 "피해자가 두 번 움직이는 동안 피고인이 두 번 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 그 시간은 0.3초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접촉이 없었거나 설사 접촉했더라도 피해자를 피하려던 피고인이 어쩔 수 없이 사고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피고인은 '피해자 자신의 오토바이와 충격했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모욕죄 여부를 따지는 과정도 팽팽했다. 피고인은 연신 '반말은 했지만, 욕설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증인으로 나선 목격자는 "군대는 갔다 왔느냐"는 등의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낄만한 언행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재판이 막바지로 치달은 오후 7시. 검찰은 박씨에게 징역 1년 4개월을 구형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에게는 '평의'와 '평결'이라는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아있었다.
CCTV에는 정확한 충격 장면이 담기지 않았고, 재판 내내 피해자와 피고인의 주장도 극명하게 갈렸었다. 배심원단은 재판 과정에서 주어진 피해자의 상처 사진, 진단서, 증인의 증언, 박씨의 범죄 경력 등을 종합해 결론을 내려야 했다.
45분에 걸친 토론 끝에 1심 배심원단은 특수상해는 무죄, 모욕죄는 유죄로 판단해 박씨에게 1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배심원단의 의견이나 결과는 권고적 효력만을 가지지만, 이날 재판부는 배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기자는 '그림자 배심원' 자격으로 이날 열린 재판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봤다. 그림자 배심원은 실제 배심원단처럼 국참을 참관하고 사법 제도를 경험하도록 법원이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코로나19로 잠시 멈췄다 최근 재개됐다.
실제 배심원들이 토론을 하는 동안 그림자 배심원도 모의 평결을 내렸다. 대다수는 박씨에게 미필적 고의가 없다고 봐 특수상해는 무죄로 봤지만, 박씨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했고 이를 제3자가 들었다고 인정해 모욕죄는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림자 배심원들은 박씨에게 100만 원의 벌금형을 정했다.
장장 10시간 동안 이어진 재판이었다. 지칠만도 하지만, 배심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법정을 빠져나왔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30대 김모씨는 "재판 들어오기 전에는 피해자에게 마음이 가 치우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증거물 등에 입각해서 의견을 정하게 됐다"고 했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는 설명이 있었지만, 평의하는 과정에서는 (설명이 부족해)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교육업에서 일한다는 A씨는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하면 공가 처리가 된다고 해서 하루 공가를 내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에서 보던 국민참여재판과 실제 재판을 비교해볼 수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었다"며 "판사와 검사의 설명도 충분해 다른 사람에게도 한번쯤 경험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법원은 국민참여재판를 활성화하기 위해 종료 시간별로 배심원에게 일당을 차등 지급하는 등 유인책을 쓰고 있다. 다만 10년 전인 2013년에는 345건까지 올랐으나, 코로나19 이후 100건 아래로 떨어져 2020년엔 96건, 2021년엔 84건에 그쳤다. 이처럼 열리는 건수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어 법원은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