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광양에서 열린 74주기 합동 추념식. 유대용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 왜 '형제묘'를 지웠나…여순의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깊었다 ② '빨치산'에 가려진 광양의 여순…75년 만에 푸는 금기의 빗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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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10·19사건 발발 1년 여가 지난 1949년 11월 11일.
입동이 지난 늦가을의 정취가 여전했지만 빨치산 습격과 군경의 진압작전 사이에 치인 전남 광양의 민초들의 삶은 엄동설한과도 같았다.
엄혹한 시대의 화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향했다.
25세 청년 농부 황성호 씨 또한 그랬다.
황 씨는 현 옥룡초등학교 인근 상평이용원(광양시 옥룡면 신재로 597)에서 이발을 마친 뒤 영문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군복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14연대 군인으로 몰려 오인 사살됐다.
당시 상황을 전언한 옥룡면 주민 박채규 씨는 황 씨와 같은 사연의 희생자들이 부지기수일 거라고 혀를 찼다.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광양시 옥룡면 상평이용원. 10여 년 전까지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현재 흔적만 남았다. 유대용 기자이처럼 광양에서는 억울한 사연들이 75년 만에 기록되고 있다.
올해 이뤄진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최종보고서에는 아구사리동산, 우등박골 등 신규 발굴한 22개소를 포함해 모두 45곳의 여순사건 유적지 자료가 정립됐다.
민간인 희생자와 빨치산 활동도 포함됐다.
기존 여순사건 유적지 자료는 서술을 중심으로 이뤄졌거나 '2012년 광양의 호국항쟁 사적조사 연구용역'에서 여순사건에 대해 41개의 유적지를 소개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광양지역 유적지 조사는 여순사건이 지역마다 상이하게 전개된 점이 반영됐다.
1948년 10월 19일 시작된 14연대 군인들의 봉기가 순천은 사흘 만인 10월 23일, 여수는 이레 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됐지만 백운산과 같은 산악지대와 인접한 광양에서는 단기간에 진압되지 않았고 소위 빨치산 활동 형태로 한국전쟁이 종료된 이후까지 지속됐다.
광양지역을 논할 때 빨치산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광양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중 약 65%가 빨치산의 거점이었던 백운산에 인접한 곳에서 발생했다.
광양읍 여순사건 유적지 위치(1959년 광양지방도). 광양시 제공특히 옛 광양군청(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9)은 빨치산의 습격이 빈번했고 광양읍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던 중요 유적지다.
이번 조사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하는 곳으로, 1949년 9월 16일과 1951년 1월 14일 각각 빨치산의 습격을 당했다.
습격 과정에서 경찰과 군경 29명이 사망했으며 주민 수십여 명도 연행돼 사살됐다.
옛 광양경찰서(광양시 광양읍 읍내리 227-1) 역시 군경, 민간인 가릴 것 없이 희생자가 발생한 장소다.
1948년 10월 20일 여수 14연대 봉기군에 의한 사상자 발생을 발단으로 유치장에 수감된 좌익 혐의자 27명이 총살 당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민간인이 연행돼 희생됐다.
광양경찰서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반송재 주령골 입구(광양읍 덕례리 산302 일원)와 같은 곳으로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박발진 광양여순10·19연구회장이 광양지역 여순사건 유적지 목록을 살펴보고 있다. 유대용 기자이번 조사에 대해 박발진 광양여순10·19연구회장은 광양에서 처음으로 여순사건 유적지를 체계화하고 백운산 빨치산 활동을 기록해 의의가 있다면서도 한계를 지적했다.
"남은 과제가 많다. 광양은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활동과 진압, 토벌하는 군경의 작전을 함께 밝혀야 하는데 군경의 작전은 그나마 선행 자료가 있는 편이지만 빨치산 활동 자료를 파편화돼 정리가 미흡하고 현장 확인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며 "금기로 여겨졌던 빨치산 활동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의미는 있지만 유적지를 중심으로 소개하다보니 전체 활동에 비하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또한 향후 희생자, 유족의 명예회복과 배·보상을 위해서는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실상 고령의 희생자, 유족을 탐문해 조사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했다"며 "국가기관의 재판 기록 등 당시 자료가 있더라도 부역행위에 대한 내용만 있을 뿐 빨치산의 협박 등 부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사정은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자료 공개가 희생자, 유족의 상처를 더욱 벌릴 가능성이 큰 이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광양은 '여순사건'이 아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유족들의 대응도 역시 여수와 순천에 비해 산발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계기로 광양 유족들은 유명무실했던 유족회 조직을 새롭게 꾸리고 향후 유적지 발굴, 관리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광양시 광양읍 우산공원에 설치된 광양 10·19 추모비. 유대용 기자한편 광양읍 우산공원에 들어서는 추모 조형물도 유족들의 결속력을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최광철 사무국장은 "광양은 여수와 순천과 달리 여순사건이라는 맥락으로 민간인 희생 조사를 실시하지 못했던 곳인데 특별법 통과를 기점으로 제대로 된 자료들을 하나씩 체계화시키고 있는 과정"이라며 "연구용역을 비롯해 추모시설 건립까지, 민관협의회와 지역사회의 의지를 바탕으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규모를 떠나서 유족들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