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김기훈.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2021년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이하 BBC 카디프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바리톤 김기훈(32)이 다음달 26일 '클래식 음악의 심장' 영국 위그모어홀에 데뷔한다. 이에 앞서 같은 달 4일에는 한국 관객을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독창회)을 연다.
김기훈은 최근 서울 강남구 포니정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BBC 카디프 콩쿠르 당시 위그모어홀 관장님이 리사이틀을 제안했다. 영국뿐 아니라 외국에서 리사이틀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긴장된다"며 "BBC 카디프 콩쿠르 이후 제 노래를 진득하게 듣는 팬들이 생겼는데 그분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겨 좋다"고 했다.
공연 프로그램은 가곡으로만 채웠다. 1부는 브람스 연가곡 '네 개의 엄숙한 노래'와 이원주의 '연', '묵향', 조혜영의 '못잊어'로 구성했다. 2부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오', '꿈', '대낮처럼 아름다운 그녀' 등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으로 꾸렸다.
"한국 가곡은 외국 관객에게 알리고 싶어 선곡했어요. BBC 카디프 콩쿠르 때 한국 가곡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김주원)를 불렀는데 심사위원과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죠. 한국 가곡에는 한(恨)도 서려 있고 민요스러운 면도 있죠. 한국 가곡만의 색깔을 외국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은 그가 평소 존경했던 바리톤 드미트리 흐로보스토프스키(1962~2017)를 오마주하기 위해 골랐다. "흐로보스토프스키는 음악가로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멋진 사람이었어요. 직접 만나서 손도 잡고 얘기도 해보고 싶었는데 이젠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네요. 대신 영혼의 교감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그가 생전에 했던 라흐마니노프 콘서트 프로그램을 가져왔어요."
바리톤 김기훈.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김기훈이 성악가가 된 과정이 재밌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는 "당시만 해도 곡성은 클래식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클래식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며 웃었다. "고2때 진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노래'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TV프로그램 '열린음악회'에 나온 성악가를 성대모사하는 개인기가 저를 먹여 살리는 업이 될지 몰랐어요. 하하"
BBC 카디프 콩쿠르 우승 후 김기훈은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큰 산을 오르고 나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 같았는데 한동안 노래가 안 됐어요. 이겨내려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차근차근 정리해보니 부족한 것이 보였죠. 슬럼프를 극복하고 난 후 성장한 자신을 봤고 이제는 (슬럼프가) 두렵지 않아요."
그는 "목표를 달성한 후 찾아오는 허탈감 때문에 슬럼프가 온 건 아니었다. 콩쿠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제 음악 인생의 작은 일부다. 더 좋은 음악을 하고 싶고 더 편안한 발성을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며 "제가 크리스천인데 '이 정도면 됐지' 시건방진 생각을 할 때 주님이 한 번씩 채찍을 드신다"고 했다.
김기훈은 '웃으며 노래하는 성악가'로 유명하다. "어딜 가도 '웃는 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물론 웃어야 할 때는 웃지만 음악의 분위기나 가사 내용에 맞게 표정을 바꾸죠."
이는 외국에서 오페라 가수로 쓰임을 받는 데도 유리하다. "성악가가 소리 내는 것에 치중하다 보면 표정이 일그러지죠. 기쁜 노래 부를 때도 표정과 몸동작이 부자연스러워져요. 웃는 연습을 따로 하지는 않는데 오페라뿐만 아니라 리사이틀 무대에서도 자연스럽게 부르는 게 중요하죠."
김기훈은 최근 미국 텍사스 달라스 오페라에서 '토스카' 스카르피아 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23/24시즌 영국 코벤트가든에서 오페라 '라보엠' 마르첼로 역,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오페라 '돈 카를로' 로드리고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24/25 시즌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오페라 '라보엠' 쇼나르 역으로 데뷔한다.
"정말 맡고 싶었던 악역 '스카르피아'에 캐스팅됐을 때 주변에서 걱정하길래 '웃으며 사이코 연기하면 더 무섭지 않겠느냐'고 했죠. 다행히도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역할을 저만의 색깔로 표현할 수 있는 팔색조 같은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바리톤 김기훈. 아트앤아티스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