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장은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3차 혁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 등을 직격해 총선 불출마 또는 수도권 험지 출마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윤창원 기자총선이나 대선 등 큰 선거를 앞두면 여의도에 이른바 정치 시나리오 작가 3,4백 명이 활동한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전.현직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정치 컨설팅 회사, 여론조사 회사 소속이거나 이들과 관련돼 있다.
이들은 선거판세를 분석하고 전망하며 시의적절한 화두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대교체, 영호남 물갈이, 주류 퇴장론, 제3지대 신당론 등이다.
이런 시나리오들이 정치적 흐름과 시대상황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나름 책사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여야 정당 지도부와 연계돼 있기 때문에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험지출마론도 같은 맥락이다. 험지출마론은 영호남과 서울 강남권 등 이른바 따뜻한 곳에서 선수를 쌓아온 중진들에게 치열한 격전지, 또는 당선되기 어려운 곳에 출마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의 숨은 의미는 "니가 가라, 시베리아"로 읽힌다. "니가 가라, 하와이"의 반대말이다.
알박기를 해온 중진이 빠진다면 정치신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오랜 선거 경험과 당선 경력을 가진 중진들을 험지로 보내면 한 석이라도 더 건져내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진영논리와 지역구도에 익숙한 한국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에 쉽게 답할 수 있다.
험지출마론은 정치 시나리오에서나 가능한 가설일 뿐 현실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자기희생을 감수한 중진 의원의 험지 출마가 총선 전체 판세에 얼마나 파급력을 주는지도 의문이다.
국민의힘에는 3선 이상 중진이 31명이다. 수도권 출신 5명을 빼면 대부분 영남과 충청, 강원 출신들이다.
이들을 수도권에 내보내도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앞선 선거들이 증명했다.
2020년 총선 당시 (왼쪽부터)홍준표, 김태호, 권성동 의원은 수도권 출마 권고를 끝내 거부하고 국민의힘을 탈당한 뒤 무소속 출마해 당선됐다. 윤창원 기자가장 가까운 사례로 2020년 총선 때 홍준표, 김태호, 권성동 의원은 당에서 수도권 출마를 권고했지만 끝내 거부하고 탈당한 뒤 무소속 출마해 당선됐다.
서초 출신 재선인 이혜훈 전 의원은 동대문을로 가고 TK 출신 김재원 의원은 중랑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에 3선 이상 중진은 43명으로 이들 중 34명이 수도권에 지역구를 갖고 있다.
이들에게 영남 지역에 출마하라는 것은 험지에 가서 장렬히 산화하라는 얘기다.
민주당에 TK 출신 의원들이 적지 않다. 상주 출신 서영교, 칠곡 출신 전혜숙, 영천 출신 권칠승, 예천 출신 김병주, 대구 출신 조응천, 강선우 의원 등이다.
이들에게도 당 일각에서 고향 출마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안동 출신인 이재명 대표의 대구 또는 안동 출마설도 이런 맥락이다.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총선기획단 1차 회의에서 이재명 대표가 안경을 만지고 있다. 윤창원 기자그러나, 이들 의원들이 영남에 출마해 당선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수도권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본인과 당에도 도움이 된다. 영남에 지역구를 가진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험지 출마는 정치적 바람몰이 보다 오히려 순수한 개인적 결단으로 성공한 사례가 더 많다.
2016년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의 순천 출마와 민주당 김부겸 후보의 대구 수성갑 출마가 대표적이다.
국민의힘 수도권 중진인 권영세 의원은 최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중진들은 오히려 자신의 지역을 지키는 것이 더 의미 있다. 험지는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는 뜻을 밝혔다.
권 의원의 지적에 실제로 공감하는 목소리가 여야 모두에 훨씬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지출마론을 계속 제기하는 것은 인위적 물갈이를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현실성도 효율성도 검증되지 않은 험지출마론은 뚱딴지 같은 소리일 뿐이다. 총선 공천을 통해 정치권에 세대교체와 물갈이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런 비과학적인 정치적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시대역행일 뿐이다.
험지출마든 물갈이든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뒷전에 놓은 채 특정인을 겨냥한 바람몰이는 순수하지 못한 정략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