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있는 '제주4·3희생자위령비'.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⑤국경 넘어선 4·3밀항인의 '고향 사랑'…제주 발전 토대 ⑥'남북분단 축소판' 재일제주인 사회…이산가족까지 ⑦"유령 같은 존재"…역사의 어둠 속 묻힌 제주4·3밀항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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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온 제주인들. 무장대와 토벌대를 피해 고향 땅을 어쩔 수 없이 떠나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4·3 희생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4·3의 전국화 세계화' 속 과거사 해결 과정에서 이들은 늘 소외됐다. '유령 같은 존재'인 이들의 역사는 어둠 속에 묻혀 있다.
◇4·3 해결 과정서 "없는 존재"
제주4·3은 수십 년간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됐다. 특히 대통령과 군·경 수뇌부가 대규모 양민 학살에 대해서 사과하는 등 과거사 해결에 큰 진전을 이뤘다.
4·3특별법 개정으로 지난해부터는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1인당 최대 9천만 원 규모로 정부 차원의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4·3 해결 과정에서 재일제주인은 늘 배제되고 있다.
고성만 제주대 사회학과 부교수는 "4·3특별법을 토대로 한 과거사 해결을 보면 피해 시점이 명확하고 장소도 '제주도'로 정하고 있다. 그 범주에 속하지 못한 인간 군상들은 법의 시민권을 얻는 작업을 방해한다. 대한민국 국경, 국민, 국가 밖에 있는 4·3밀항인이 그런 존재"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과거사 해결 프로그램이 대부분 '신청주의'로 작동된다. 국가가 잘못한 사건에 대해 희생자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당사자가 신청을 해서 희생자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 있어서 희생자로 신청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 존재'가 돼버리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 고상현 기자이렇다 보니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인이 4·3희생자나 유가족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가 심의·결정한 4·3희생자와 유족은 모두 12만2076명이다. 이 중 일본에 거주하는 희생자와 유족은 900여 명으로 0.7%에 불과하다.
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진척시키면서 드디어 피해 보상까지 이룩하게 된 그동안의 4·3해결 성과가 재일제주인 사회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말해준다. 피해신고나 보상은커녕 기초가 될 실태조사도 제대로 이뤄진 적 없다"라고 강조했다.
다행히 재일제주인 실태조사는 재일본 4·3희생자유족회 요청으로 지난해 3월이 돼서야 시작됐다. 다만 그동안 이념 장벽 때문에 가로막혔던 조총련 계열 피해 조사가 과제로 꼽힌다.
◇4·3 피해 지원 혜택서도 '소외'
특히 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온 제주인은 일본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4·3 피해 지원 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4·3 희생자 유족 신청 창구도 제한적이고 신고 기간을 맞추기 어려울뿐더러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더라도 제주에서처럼 의료비, 생활비 등을 받을 수 없다.
지난 10월 14일 오사카 KCC회관에서 열린 제주4·3국제포럼. 고상현 기자홍정은 오사카공립대학교 오사카코리안 연구플랫폼 특임조교는 지난 10월 14일 오후 오사카 KCC회관에서 열린 '제2회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재일 4·3유족 중에는 많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혈연·지연 등의 연결고리가 끊겼다. 증언받기조차 어렵고 이를 위해 고령의 희생자와 유족이 일본과 제주를 왕래해야 한다. 한국어로 소통할 수 없는 후손들에게도 큰 부담이다. 일본 내 상시적인 신고 창구 마련과 지원방법이 모색돼야 한다."
"특히 제주에서는 보상과 함께 의료비나 생활비 지원도 이뤄지는데, 재일제주인은 희생자 보상만 이뤄지고 있다. 거주 지역이나 국적으로 4·3 피해자를 축소시키는 방법으로 지원 해법이 마련된 것에 의문을 가진다. 지역 사회를 넘어서 보다 포괄적인 측면에서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 4·3 당시 외삼촌 둘을 잃고 일본 밀항을 택한 고춘자(82·여)씨는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호적상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 딸로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뒤틀린 호적 관계를 정리하려면 한국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지리적 여건상 어려운 상황이다.
오광현 재일본 4·3희생자유족회장. 고상현 기자오광현 재일본 4·3희생자유족회장은 "4·3 당시 일본으로 밀항 온 제주인도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군경 토벌대 또는 무장대를 피해 어쩔 수 없이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한 상황과 여건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4·3 과거사 해결도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4·3정명에 "밀항인 목소리 주목해야"
희생자 위패가 있는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는 여전히 비문을 새기지 못한 '백비'가 누워있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7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껏 해결되지 않은 4·3의 과제다.
연구자들은 4·3 정명(正名)에 있어서 역사의 그늘 속에 있는 4·3밀항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북 분단의 비극과 학살, 차별 등 소수자 문제의 집합체인 것이다.
4·3평화공원 내 백비. 고상현 기자
고성만 제주대 사회학과 부교수는 "4·3희생자의 지위를 여태껏 '유령 같은 존재'였던 4·3밀항인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4·3 과거 청산 문제에서 '시민권'을 갖는 존재들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 열린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4·3에 대해 이름을 뭐로 할지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정은 오사카공립대 특임조교는 "4·3밀항인의 경험과 기록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작업이 다각도에서 실천될 필요가 있다.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아온 재일제주인이 어떻게 4·3을 겪고 목격했고 그 결과 어떻게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지 가시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8년 11월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세워진 '제주4·3희생자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희생자위령비에는 제주도 178개 마을에서 직접 주워온 돌들이 놓여 있다.
'4·3의 비극과 일본과의 관계는 대단히 깊다.(…) 토벌대는 거의 일제강점기 지배 기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반면, 무장대는 항일운동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었다. 4·3 혼란기 수많은 도민이 목숨 걸어 일본으로 건너왔다. 4·3의 진상규명이나 명예 회복은 이러한 역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오사카 통국사에 있는 4·3희생자위령비. 제주 각 마을에서 가져온 돌들이 놓여 있다. 고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