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빌리지 글렌(Village Glen)'의 메인 건물 앞에서 '마켓 데이'를 위해 음식을 조리하고 있는 입주자들. 이은지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평균 '80대 중반'에 시설 입소하는 호주…"홈케어가 新표준" ②[르포]"은퇴 이후부터 임종까지"…'올인원' 돌봄 마을 (계속) |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지난달 14일 낮 12시 반쯤(현지시각) 찾은
'빌리지 글렌(Village Glen)'은 공교롭게도 연중 이벤트인 마켓 데이(Market Day) 진행이 한창이었다. 호주의 노인들이 은퇴 후 입소한 시설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지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멜버른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모닝턴 반도(Mornington Peninsula)는 빗방울이 부슬부슬 내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모인 이들은 흥겨워 보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메인단지 앞 널찍한 마당에 차려진 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이 매대에 진열한 상품 면면은 다채로웠다. 잼부터 처트니(chutney·인도산 매운 양념) 및 피클, 손수 짠 니트 장난감, 수제 장신구, 베고니아 같은 화초와 그림들 등이다. 시니어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페니파딩(penny-farthing·앞바퀴는 아주 크고 뒷바퀴는 아주 작았던 초창기 자전거)' 관련 물품도 있었다.
시즈닝 후 훈제 중인 소시지 냄새는 허기를 자극했다. 입소자들이 직접 구워낸 홈메이드 스콘을 곁들인 데번셔 티(Devonshire tea) 세트는 6달러(AUD, 한화 약 5200원)에 팔렸다.
마켓데이 홍보지에는 "교통체증과 인파, 주차문제로 싸울 필요 없이 크리스마스 쇼핑을 시작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익살스러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입소자들은 가족과 친구, 지역 주민 등과 함께 실내·외로 4시간 동안 이어진 행사에서 천천히 음식과 대화를 즐겼다.
12월 3일 '가족의 날' 추첨이 예정된 자체 성탄 복권(X-mas raffle) 판매도 이뤄졌다. 1등 현금 600달러(한화 약 52만원), 2등 400달러(약 35만원), 3등 '몬스터 선물 바구니'….
백화점 불빛이 휘황한 시내도 아닌 해외 근교의 요양시설 단지에서, 기자는 처음 성탄이 임박했음을 실감했다.은퇴後 독립적 생활부터 말기 요양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마을'
호주 '빌리지글렌(Village Glen)'의 돌봄모델에서 1~2단계에 해당하는 입주자들이 거주하는 단독주택의 전경. 홈케어 등 비교적 간단한 재가서비스를 받는 노인들은 마을 내 요양시설(Aged Care)로 옮기기까지 10년 이상을 여기서 산다. 이은지 기자 민간시설인 빌리지 글렌은 지난 1980년 건축가였던 차스 야콥센(Chas Jacobsen)에 의해 세워졌다. '어머니가 은퇴 후 살기에 충분히 좋은 거주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비전은 어느덧 3대가 이어 경영하는 가업(家業)이 됐다.
모닝턴에서 '최고의 은퇴생활(the very best in Retirement Living)과 홈케어(Home care support), 노인요양(Aged Care)' 제공을 표방하고 있다.
복합 주거단지인 이 시설의 특이점은 은퇴 이후의 삶을 돌봄 단계별로 유기적으로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노인들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입주하는
퇴직자 마을(retirement village)이 1단계(Stage 1), 이같은
단독주거를 유지하되 재가서비스를 받는 2단계(Stage 2), 마지막으로 24시간 도움을 받는 별도 노인요양시설(Stage 3·aged care)이 거대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일단 빌리지에 들어오면, 자신의 건강상태에 따라 죽을 때까지 안에서만 주거지를 옮기면 되는 것이다.
1·2단계의 경우, 홈케어(Home care) 여부만 다를 뿐 지내는 곳은 동일하다. 붉은빛 지붕에 우드톤 벽돌, 흰 기둥을 갖춘 주택 앞마당에는 푸른 잔디와 꽃들이 가득했다. 창 너머로는 열매가 열린 체리나무가 눈에 띄었다. 형태가 규격화된 집들은 매우 잘 정돈된 고급 단지의 느낌마저 풍겼다. 도로 한쪽엔 집주인이 애용하는 듯한 '여행 트레일러'도 보였다.
상담 고객 등 잠재적 입주자들에게만 공개되는 모델하우스 내부는 아늑했다.
'전시용'임에도 화장실에는 낙상 방지를 위한 안전손잡이가 모두 설치돼 있었다. 가장 작게는 방이 침실 1개인 테라스 아파트부터 차고가 2개나 구비된 방 3개짜리 단독빌라에 이르기까지 규모는 다양하다.
입주자들은 각자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입주 당시 최소 27만 5천 달러~90만 달러(한화 약 2억 4천만 원~7억 8천여만 원)의 입주료(entry fee)를 낸다. 다만,
일종의 보증금 성격으로 퇴소 시 80%는 다시 돌려받는다. 일정 자본이 필요한 셈인데, 본래 살던 자가를 매각한 돈에 정부로부터 매달 받는 연금을 감안하면 그리 비합리적인 금액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빌리지글렌에서 32년간 일해온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ons Officer), 피터 닐슨(Peter Nilsson)은 "호주에선 보통 65~67세가 은퇴연령인데 67세부터 연금을 탈 자격이 생긴다"라며
"빌리지글렌에 사는 800여 명 중 60%는 연금이 그들의 유일한 소득"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싱글 기준으로 연간 연금이 3만 달러(한화 약 2600만원) 정도 된다고 전했다. 입주자가 매달 내는 생활비는 연금액의 약 24%로 충당된다.
'빌리지글렌'에는 단독주택뿐 아니라 방 1개짜리 아파트먼트 유형의 집도 있다. 테라스에서는 입주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야외 볼링장 등과 넓은 정원이 내다보인다.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 '빌리지 글렌' 내 온수수영장에서는 입주 노인들이 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무료 수중치료 및 신체활동 수업이 이뤄진다.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입주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식사 준비(배달 등 포함), 청소와 집 개·보수, 잔디 깎기 등 마당정원 가꾸기, 온수 수영장을 이용한 수중 운동치료, 지역의사 진료를 위한 이동 지원 등이 있다. 생일이나 기념일 등에는 예약만 하면 식당·카페 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관·게임 등 취미활동을 위한 부대시설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은퇴자 단지는 최소 60세만 되면 입주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거주자들이 들어오는 연령은 대개 75세 정도다.
빌리지 안에 있는 635개의 주택에는 880명의 노인들(평균 연령 82세)이 살고 있다. 45%는 배우자와 동거하는 커플, 55%는 싱글들이다.
이들은 각자의 '집'에서 약 12~15년을 살다가 마을 내 요양시설로 넘어간다. 80·90대 입소자들은 이곳에서 평균 18개월을 더 산다. 간혹 외부 소재 병원으로 이송돼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는 이 요양시설에서 의료진과 스태프의 보살핌 속에 완화치료를 받다가 숨진다. 피터는 이를 두고
'연속적 돌봄 모델(the continuum of care model)'이라 불렀다.
올해로 73세인 그는 "몇 년 안에 은퇴하면 나도 아내와 여기로 들어올 것"이라며 "한 10년간은 한국과 일본 등을 여행하며 (해외를) 오가는 삶을 살 거다.
그때부터는 여기가 '내 집(my home)'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만난 호주 당국 관계자의 말처럼 이들은 은퇴 이후를 단순히 '말년'으로 뭉뚱그려 취급하지 않았다.
노년기도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지를 최대 기준으로 삼아 관련 주기를 촘촘히 관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빌리지글렌' 입소자들을 위한 영화관에서는 찰리 채플린 주연의 <위대한 독재자>(1940) 등 노인들의 향수를 자아내는 옛 명화들도 자주 상영된다.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은퇴 이후 삶을 계획하는 노인들이 시설을 보러 와도 실제로 입주를 하는 시점까지는 꽤 간극이 있다. '빌리지 글렌'의 평균 입소 연령은 75세다. 고객 상담을 위해 꾸며 둔 모델하우스(Display villa). 보건복지부 공동취재단 1인실 기본인 3단계, 완화치료도…"누구나 집에서 죽기 원해"
'빌리지 글렌(Village Glen)'에서 30년 넘게 일해온 최고운영책임자(COO), 피터 닐슨. 그는 수년 내로 자신도 아내와 이곳으로 입주해 여행을 다니며 살 거라고 은퇴계획을 밝혔다. 이은지 기자가벼운 돌봄을 요하는 2단계까지 입주자들은 상주 간호사 1명의 지원을 받는다. 만약 집에서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질 경우 이들은 '콜(call)' 버튼을 눌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일과시간이 끝나는 오후 4시 반 이후로는 필요 시 요양시설의 간호사들이 입주자들을 살핀다. 재가서비스를 받는 '홈케어' 대상자들도 상시 의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궁극의 단계인 3단계는 보다 철저한 돌봄이 이뤄진다. 간호사 30명을 포함한 400명의 인력이 '3교대'로 입소자 180명의 상태를 관리한다.
교대근무당 간호사 2~3명은 상주하는 구조로, 의사는 2명이 1주에 2번 시설을 방문해 60~70명의 환자를 회진한다.
에이지드 케어(Aged Care)는 병원이 아니지만 특성상 이와 거의 흡사해지기 쉽다. 입소자의 현상유지와 안전이 0순위다 보니 설계 구조가 단조롭고 프로그램도 최소한만 수행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국내 요양시설에서 느꼈던 이 무채색의 '병원스러움'이 상대적으로 덜했다는 점이다.
'빌리지글렌' 내 3단계에 해당하는 에이지드 케어(Aged Care)에 마련된 게임 및 휴식 공간. 입소자들이 체스를 두거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복지부 공동취재단입소자들은 아침과 저녁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먹었고, 비건(채식주의자) 등은 개별적으로 특별식(special diet)을 요청할 수 있었다.
가족·지인이 방문하면 분리된 공간에서 식사할 수 있는 프라이빗 다이닝룸(Private Dining Room)도 활용 가능하다. 기호와 관계 등 개인이 지켜온 고유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운동시설은 재활치료 등이 주를 이루는 등 일반 입주자용 공간과 분명 차이도 있지만, 함께 모여 영화를 보는 곳부터 교회·다목적실 등은 대동소이했다. 민간이라 해도 요양서비스 제공자들이 생각하는 대상자의 필요 범위가 그리 편협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병실은 '1인실'이 기본이다. 부부 입소자의 경우, 상호 연결돼 편히 오갈 수 있는 '2인실 같은' 1인실(interconnecting room)을 제공한다. 환자가
원할 경우, 임종기 완화치료(palliative care)도 받을 수 있다.
피터는 2층의 한 병동을 가리키며 "우리 부모님이 지냈던 방"이라며 "두 분 다 여기서 완화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죽기를 원한다(people like to die at home)"며 에이지드 케어도 '입소자들의 집'임을 거듭 강조했다. 마지막 3주간은 이들이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환자·가족을 함께 지원한다고도 설명했다.
부부가 나란히 함께 입소한 '빌리지글렌' 요양시설(Residential Aged Care)의 병실 모습. 이은지 기자'빌리지 글렌'의 3단계(stage 3)는 거주형 요양시설 외 단기보호서비스(Day Respite)도 운영 중이다. 주로 노인을 돌보는 가족 등의 휴식을 지원하려는 목적이다. 이은지 기자
한편, 호주는 외부인이 요양시설을 출입할 때 여전히 코로나19 신속항원검사(RAT) '음성'을 요구한다. 이날 빌리지글렌에서는 방문 목적과 국적, 주소, 연락처 등을 모두 입력한 후에야 내부로 진입이 허용됐다.
빌리지글렌에 앞서 찾았던 '갈보리 요양시설(Calvary Residential Aged Care)'은 당일 갑자기 위장관염 환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사전에 약속된 방문을 거절했다. 대기 중인 구급차로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시설 관계자는
당국의 지침상 '락다운(lockdown)'을 해야 하는 상태라며 양해를 구했다.
일정에 동행한 현지 관계자는 "정부의 규제를 받는 시설들이다 보니 이런 부분은 굉장히 엄격(strict)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서비스 품질·안전 관리 측면에서 그만큼 만전을 기한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조용한 해변가에 자리한 시설에는 이른 아침부터 가족을 보러 온 면회차량이 여러 대 주차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