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노책주 제공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10년 전인 1588년, 전라좌군 수군 발포만호로 근무 중 인사청탁을 거부한 일로 상관 서익에 의해 무기관리 소홀로 파직당한 후 북방 함경도로 백의종군했다. 당시 그는 여진족과의 녹둔도 전투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사로잡은 공으로 사면되어 복직된다.
그해 어머니 초계 변씨가 이순신에 재산을 상속한 별급문서에 따르면, 이순신의 집안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등에 땅과 노비 22명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양반들의 시대상을 보면 이 정도 재산 규모를 두고 부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명한 집안들의 분재기(재산의 상속과 분배를 기록한 문서)를 보면 가진 땅만 해도 수백에서 수천 마지기를 넘나들고 노비도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양에서 나고 자고 자란 데다 혼인까지 하고 뒤늦은 나이에 장인의 도움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초계 변씨는 가세가 기울자 가솔들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변씨 가문의 터전인 아산으로 이사한다. 거처였던 건천동은 과거를 위한 학생들이 모여든 동학과 가까운 데다 무과생을 위한 훈련원도 인접해 인기가 높았던 곳이다. 그런 곳을 마다하고 초계 변씨는 왜 먼 아산까지 떠난 것일까.
그런가 하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67세에 얻은 늦둥이 딸(숙신옹주)을 위해 고려 수도이자 개국 초기 조선의 수도였던 개경(개성)이 아닌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집을 마련해주었다. 건국 후 4년 뒤 한양 천도가 정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신간 '조선사 쩐의 전쟁'은 조선 시대상을 통해 왕가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부동산 투기에 나선 이야기, 형제간 유산 싸움, 노비가 양반을 고소해 승소한 사건 등 남녀가 유별하고 남존여비의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에서 돈 앞에서 양반도 천민도 가족도 없는 조선인들의 돈을 향한 고군분투기를 담았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놀라운 조선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다. 당시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돈과 관련한 분쟁이 생기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주저앉아 한탄하지만 않고 적극적으로 관아로 소장을 들고 달려갔다. 책은 조선 시대의 소송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조선소송실록'도 부록으로 실었다.
이한 지음 | 유노책주 | 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