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자택 앞에서의 이태준 가족. 열화당 제공 한국 근대문학의 거두이자 문학단체 구인회 창립인 중 한 명인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 탄생 120주년인 올해 그의 문학사를 아우르는 전집과 평설이 출간되고 문학관이 설립된다.
출판사 열화당은 그의 문학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4권을 최근 출간했다. 총 14권으로 기획된 전집은 한국근대 단편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이태준의 단편소설은 물론 그가 남긴 모든 장편과 일본어로 쓴 글, 번역문, 좌담과 평론문에 이르기까지 상허의 문학세계 전반을 담아낼 계획이다.
1차분은 단편을 모은 제1권 '달밤'을 비롯해 중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을 엮은 제2권 '해방 전후',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과 '화관'을 묶어 수록한 제3권, 장편 '제이의 운명'까지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됐다.
조카인 원로 영문학자 김명열(84)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5년부터 이태준의 원고를 정리하면서 이번 새 전집 편찬이 이뤄졌다.
'상허 이태준 전집'. 열화당 제공 수필·기행문을 모은 산문집 '무서록'과 문장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문장강화'는 물론 일생에 남긴 평론과 좌담·번역문 모음까지 출간된다. 마지막 제14권에서는 이태준이 작품들에서 사용한 어휘들을 예문과 함께 정리하는 것으로 전집이 마무리된다.
앞서 지난 2018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이태준의 일대기와 함께 소설, 수필, 동화 등 그의 저술에 대한 총체적인 평설을 담은 '상허 이태준 평설 1·2'가 출간된 바 있지만 다양한 작품과 사료를 포함한 전집으로는 '상허 이태준 전집'이 처음이다.
'상허 이태준 평설 1·2'는 철원 출신 정춘근 시인이 지역 신문에 장기 연재해 온 '상허 이태준의 삶과 문학'을 보완해 책으로 펴낸 평설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군이 이태준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상허 이태준 문학관'을 개관한다.
철원군은 올해 가을 정식 개관을 목표로 그의 고향과 가까운 철원읍 철원역사문화공원 내에 399㎡ 크기의 문학관 건립을 추진한다. 문학관에는 이태준의 생애를 정리한 콘텐츠와 함께 군이 확보해 온 이태준의 작품집과 만년필, 이태준과 관련된 신문 자료 등 총 12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태준(李泰俊)은 1904년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문교와 모친 순흥안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상허(尙虛)다.
1921년 휘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일본 동경 조오치 대학에서 수학하다 학교의 비리와 전횡에 대항해서 일어선 동맹휴교에 주모자로 인정돼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제적되면서 귀국한다.
1929년 3·1 운동 이후 민중의 자주의식·자유사상·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민족의 진로를 제시했던 '개벽'의 기자로 활동했다. 단편 '오몽녀(五夢女)'를 '시대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선우미디어·실천문학사 제공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장단편 작품을 남겼다.
1930년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했다. 1931년 이후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며 1933년 박태원, 이효석, 정지용, 김기림 등과 함께 문학 문인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고 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는 등 자신의 문학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냈다.
그의 저서 '문장강화'는 문장의 감각적 사용과 근대적 작법을 강조해 문장론의 고전으로 꼽힌다. 1939년 '문장'의 편집을 맡아 신인추천제도를 도입, 임옥인, 최태응 등 작가를 추천했다.
1943년 낙향해 칩거하다 해방 후 다시 귀경해 조선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 1946년 돌연 월북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소련여행기'를 썼다.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왕성한 문학활동을 했던 서울 성북동의 집터 '수연산방'도 남아 있다. 직접 당호를 지은 그는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 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많은 문학 작품을 이곳에서 집필했고 수필 '무서록'에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을 기록했다.
상허 이태준 문학관 조감도. 철원군 제공 그는 6·25 한국전쟁 당시 남측 문인들을 구하려다 실패하고 1956년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숙청돼 교정원과 노동자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잘 제1실 전속작가로 복귀했지만 1969년 강원도 탄광촌에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는 마지막 소식이 전해진 뒤 연도 미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 초기인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궁핍한 시대의 단면을 예민하게 드러내는 한편, 193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문학적 기교가 한층 성숙해졌다.
한국근대 '단편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이태준의 문학은 역사적 현실을 세련된 문학적 기법으로 완성한 예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