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유럽상의 회장과 인사하는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의 다음 주 독일·덴마크 순방 일정이 연기됐다. 대통령실은 "여러 요인을 검토했다"면서도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진 않았다. 국내 현안에 집중하는 행보라는 해석과 함께, 김건희 여사 사안 등 정무적 판단이 고려된 결정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출발을 불과 나흘 앞두고 내린 결정에 이미 준비를 마친 경제사절단 등은 혼란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이 순방을 연기한 건 취임 후 처음이다.
14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독일·덴마크 순방은 다음 주 일정을 목표로 준비됐으나, 여러 요인을 검토한 끝에 순연된 것으로 전해졌다.
순방 연기설은 전날부터 정부 안팎에서 나왔다. 당초 순방은 오는 18일부터 일주일 일정으로 독일과 덴마크를 각각 국빈, 공식 방문 형식으로 찾기로 했으나, 출발을 불과 나흘 앞두고 전격 순연 결정을 발표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여러 요인' 외에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진 않았다. 다만 대통령실 내부에선 경제·민생·안보 등 당면한 국내 현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배경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대한 의사 단체들의 집단행동 예고와 잇따른 북한의 군사 도발 상황 등도 감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함께 '명품백 수수 논란'에 휩싸인 김건희 여사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무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란 시각도 제기된다.
김 여사는 지난해 12월 네덜란드 국빈 방문 이후 공개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김 여사가 이번 순방에 동행한다면 야당의 공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렇다고 순방에 동행하지 않을 경우 윤 대통령 홀로 외국 국빈 방문을 하는 상황이 되기에, 사실상 '딜레마'에 빠진 양상이었다는 분석이다.
국익이 달려 사실상 '초정파적인' 성격의 순방이 야당으로부터 그동안 꾸준히 정쟁 대상이 돼 왔고, 총선을 약 두 달 앞두고 또 다시 '정치 쟁점화'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 등으로 순방 자체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민생 행보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대통령실은 최근 민생 토론회 등 연이은 민생 행보가 여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초부터 정부부처 업무보고를 겸해 시작한 민생 토론회는 당초 계획보다 일정을 확대해 연중 내내 이어질 예정이다.
순방 출발 나흘 전 돌연 '연기'…"상당히 이례적"
지난해 10월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국빈 방문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귀국길에 오르며 환송객들에게 손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윤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해까지 총 16차례 해외 방문을 했는데, 예정된 일정을 연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후 순방 일정도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러 복잡한 사안들을 검토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순방을 갑자기 연기한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대통령 순방은 △해외순방 기본계획 수립 △방문일자교섭 △구체 방문일정 수립 △정부합동답사단 파견 △수행원 결정 및 구체 방문일정 계획 수립 △대통령 해외순방행사 시행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주요 외교일정 및 주기적인 다자정상회의 개최 시기 고려, 방문의 격과 의전상 예우 범위, 경호, 숙소, 관계 기관 협의, 방문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일정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조율 사안은 더욱 광범위해진다. 이에 따라 준비는 수 개월에서 1년도 걸릴 수 있다고 한다. 좀 더 이른 시기 일정 조율을 할 수도 있지만, 돌연 연기는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통령실은 독일, 덴마크 측과 조율을 거쳐 결정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 역시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걸로 안다"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이번 순방은 경제 행보에 초점을 뒀던 것으로도 전해졌다. 하지만 갑작스런 순연에 따라 순방에 맞춰 경제사절단을 꾸린 재계 단체도 혼선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또 다른 여권 고위 관계자는 "순방이 순연됐다 하더라도 양국 기업 교류에 지장이 있진 않다"고 설명했다.
한편 과거 정부에서도 해외 순방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로 유럽 등 순방 일정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로 미국 등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로 미국 순방을 연기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멕시코 국빈 방문 일정을 순연했다.
한 정치외교 전문가는 "국가 재난이나 큰 국내 현안이 발생할 때 순방이 연기되는 경우는 봤지만, 이번 사안처럼 이유가 불분명한 채 순연되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은 국내 현안이 산적해 순방을 연기했다면 잘한 일이라면서도, 김 여사에 대한 여론이 부담되거나 총선 격전지를 돌기 위한 게 아닌지 호의적으로 보긴 어렵다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