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병원이 병상 수와 인력을 줄이는 등 축소 운영에 들어간 지난 7일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 접수창구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진환 기자지난달 20일 본격화된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이 11일로 3주째에 접어들었다. 사직 당일, 대한전공의협의회 긴급총회에서 박단 비상대책위원장이 한 말("1년 이상도 갈 수 있다")처럼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제시한 '복귀 데드라인'(2월 29일)을 넘긴 전공의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면허정지 처분에 착수하고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의 의사업무 수행을 승인하는 등 압박수위를 높인 데 반해 돌아온 의사는 극소수다.
기약 없는 강대강 대치에 국민들의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1천억대 예비비와 건강보험 재정을 연이어 투입키로 한 정부는 "대한민국 의료의 비상대응 역량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강조하지만, 환자들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의대 증원의 최대 명분인 '국민 생명과 건강'을 정말 고려한다면, 협의체 구성 등에 의지를 보여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의료대란'=과장된 표현?…"전공의 지키자" 교수 가세 조짐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중대본 제1총괄조정관)이 지난 8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복지부 제공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8일 오전 기준 주요 수련병원 100곳에서 계약을 포기하거나 사직서를 내고 떠난 전공의는 1만 1994명으로 전체 약 93%에 이른다. '최소 3개월간 면허정지'는 물론, 고발도 예고한 정부의 엄포에 전공의 500여 명이 돌아오는 등 복귀 움직임이 일부 관측되는 듯했으나 유의미한 확산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오히려 이달 1일 자로 신규 임용을 앞두고 있던 1년차 인턴 또는 레지던트까지 줄줄이 빠져 나가면서, 이탈 규모는 열흘 새 3천 명 가까이 불어났다.
설상가상 최근에는 전공의의 빈자리를 힘겹게 채워온 '선배'들인 전임의(펠로)·교수 등도 들썩이고 있다. 환자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남은 이들 다수도 대규모 의대증원에 반감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언제까지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빅5'에 속한 서울아산병원은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가 긴급총회를 통해 '전 교원 사직서 제출'에 합의한 상태다. 응급실을 포함한 필수의료과는 잔류 의료진의 피로가 극에 달했고, 전공의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순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톨릭대 의대와 경북대 의대 학장단 등 교수들의 보직 사퇴도 잇따르고 있다. 교수들이 집단행동에 가세할 경우, 비상진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거란 전망도 나온다.
정부가 편성한 1254억의 예비비도, 580억 가량이 추가 당직을 서는 진료인력 등의 '인건비'다.
이에 더해 1882억의 건보 재정까지 투입하기로 한
정부는 '의료대란'이란 표현을 두고 "과장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상급종합병원 중환자실 입원환자는 3천 명대로 평소와 큰 변화가 없고, 전체 입원환자 감소 폭도 한 달 전 대비 40%에서 33%대로 회복 중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수련생인 전공의가 현장을 비웠다고 의료에 혼란이 생기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라며 "정부는 모든 가용재원을 총동원해 비상진료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부터 4주간 의료기관 20곳에 군의관 20명, 공중보건의사 138명도 파견한다. 인력난이 심한 병원들에는 대체인력 채용 비용도 지원한다.
전공의가 전체 의사의 40% 이상인 상급병원 '과부하'를 막고자 중증·응급도에 맞는 환자 전원 등 의료체계 정상화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급병원으로의 경증환자 회송 수가 등을 인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자들 "대란 넘어 환란…누구 하나 책임 안 져"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 17일째를 맞는 지난 7일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업무를 보고 있다. 황진환 기자하지만 불필요한 '적체'를 최소화하고 공보의 등 공적 인력풀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의사 확충을 통해 살리겠다고 공언한
필수의료과의 전공의 복귀율이 비필수과보다 훨씬 낮다는 푸념도 나오고 있다.
중등증 이하 환자와 달리, 적시 치료가 절실한 암환자 등은 인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한참 지났다고 호소한다. 식도암으로 투병 중인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김성주 대표는 CBS노컷뉴스에
"현 상황은 (의료)대란 정도가 아니라 (재앙 수준의) 환란"이라고 전했다.
예정된 수술이 무기한 밀린 한 지방 암환자는 절망을 넘어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기관으로 암이 전이돼 항암에 들어가야 하는 환자들이 '진료 연기' 연락을 받는 것도 다반사다.
김 대표는 지난 6일 녹색정의당이 주최한 긴급좌담회에서 전공의들이 그들의 사직이 '개별 결정'임을 강조한 것을 두고 "자존심으로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은데, 굉장히 불쾌했다"며, 환자들에게는 그 여파가 '배의 침몰'(죽음)로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장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환자들에겐 "너무 여유로운 얘기"라는 것이다.
그는 의대 증원 찬반을 떠나, 직업윤리를 저버린 의사들에 대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서도,
뻔히 예상되는 사태를 막지 못한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의대 증원에 따른 순기능 등) '큰 그림'은 우리에게 급하지 않다"며 "저희가 정말 궁금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응급실에 가고, 침대에서 항암을 해야 하고, 수술하는 시간들이 너무 필요한데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아울러 "이 시간 이후 보건당국이 됐건, 의료계가 됐건, 중증환자들이 다 모여 필요한 게 무엇인지 같이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를 당장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사회적 대화' 제안 잇따라…"환자 먼저 생각해야"
지난 5일 서울의 한 병원에 놓인 진료 지연 안내문. 연합뉴스일각에선
'사회적 대화 기구'를 통해 해법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나순자 녹색정의당 의료돌봄통합본부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치하고 있는 의·정에게 대화를 호소하는 식으론 사태 해결이 어렵다"며
'국민 참여 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의대 증원이 국민 안전·생명과 직결된 사안인 만큼 국민이 직접 모든 쟁점을 토론하고 한 달 내 결정토록 하자는 것이다.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공론화위를 꾸려 △대한의사협회안(案) △정부안 △시민사회안 등 3가지 안을 올리자는 구상이다.
최종 결정은 국민 참여단 투표(50%)와 대국민 여론조사(50%)를 합산해 내리자고 밝혔다. 나 본부장은 최근 출범한 연금개혁 관련 공론화위를 들어 "의대정원 확대도 이렇게 논의를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보건의료노조도 지난 7일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둘러싼
강대강 대치는 누가 누구를 굴복시켜야 하는 치킨게임이 아니다"라며 '필수의료·지역의료·공공의료 위기 해법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지체 없이 시작하자고 제언했다.
노조는 정부를 향해
"말로만 대화하겠다면서 의사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말고,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관련기구 구성 계획을 공개적으로 내놓을 것을 촉구했다. 의사들에 대해서는 대화 동참 결단과 함께 "모든 집단행동을 즉시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학사 일정 등을 고려해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은 예정대로 추진하되, 2026학년도부터는 증원규모 및 기간을 해당 기구에서 논의하자고도 덧붙였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대화의 문'을 열려면 양측 다 한 발씩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가령 전공의 등이 '조건 없는 복귀'에 응한다면, 정부 또한 "2천(증원)은 절대 타협 불가"란 입장만 되풀이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증원 추진 근거가 된 의사인력 추계 연구를 각각 진행한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위원은
"정부와 전공의 모두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도 "여야가 함께 중재에 나서거나 사회적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김창수 회장은 지난 9일 협의회 회의 후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는 '2천 명'은 절대 양보 못한다는 전제조건을 빼고 전공의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