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올해 정부 예산에서 논란이 가장 뜨거웠던 분야 가운데 하나는 R&D였다.
지난해 8월 정부가 내놓은 '2024년 예산안'에서 R&D 예산은 전년 대비 무려 5조 2천억 원, 16.6%나 감소했다.
국가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시기에도 증가를 멈추지 않던 R&D 예산이 R&D에까지 '카르텔' 딱지를 붙인 윤석열 정부에 의해 일거에 싹둑 잘려 나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R&D 예산 삭감에 강력 반대했지만, 고작 6천억 원을 되살리는 데 그쳤다.
R&D 예산 대폭 삭감 충격은 곧바로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을 강타했다.
곳곳에서 연구 인력 감축과 기존 연구 축소 또는 중단 등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화하면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과학기술계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15일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올해 R&D 예산을 줄여 불안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또 "내년에는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겠다"고 호언했다.
"미래전략 분야, 신진연구자 지원 중심 투자 대폭 확대"
윤석열 대통령 말대로 내년에는 R&D 예산이 대폭 증액될지를 가늠할 수 있는 '2025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이 2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확정됐다.
내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에서 정부는 'R&D 개혁'을 강조하며 "현장체감형 시스템 개혁을 추진하고 혁신·도전형 연구, 미래전략분야, 선진연구자 지원 등 R&D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기재부는 "R&D 전 분야에서 혁신·도전형 DNA가 싹틀 수 있도록 재정투자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재부는 AI·첨단바이오·양자 등 미래전략 분야와 신진연구자 지원을 중심으로 투자 규모를 대폭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올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2024년 예산안'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AI, 첨단바이오, 반도체, 디지털 등 혁신기술 내재화에 집중 투자하고 R&D 투자를 대규모 전략프로젝트, 글로벌 협력, 신진연구자 중심으로 재편해 파급력 있는 성과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기재부는 "도전과제 대신 '나눠먹기식' 소규모 R&D 사업이 난립하고 있다"며 "관행적 지원 사업 등 비효율적인 R&D는 구조조정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2025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 기재부 제공R&D 예산 대폭 삭감 논리 내년 예산 편성 지침도 관통
올해 R&D 예산 대폭 삭감을 위해 기재부가 내세웠던 논리가 내년 R&D 예산 편성 지침도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김동일 예산실장은 "2025년 R&D 예산을 편성하는 정부 입장은 확고하다"며 "저변 확대식으로 양적 확대를 염두에 둔 '보조금식 R&D'는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동일 실장은 "도전적, 혁신적 트랙에 대해서는 R&D 예산이 확대될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올해와 내년 R&D 예산 편성 기조는 당연히 같다"며 "올해가 '버전 1'이라면 내년은 '버전 2'를 준비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 일선 연구 현장이 고대하는 R&D 예산 증액과 정부가 말하는 R&D 예산 증액은 표현은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엇갈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도전적, 혁신적으로 평가된 일부 과제에 자원을 집중시키고 "R&D 예산을 대폭 늘렸다"는 정부와 나눠먹기식 R&D로 몰려 구조조정을 당한 대다수 연구자들 간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정부는 내년 예산안 편성 목표를 '민생안정, 역동경제 구현'으로 설정했다.
내년 예산안에서도 이른바 '건전재정' 기조가 유지된다.
"건전재정 기조 확립하면서 '두터운 약자복지'는 지속"
기재부는 "건전재정 기조 확립으로 미래세대에 대한 재정의 책임성을 제고하겠다"고 밝혔다.
유병서 예산총괄심의관은 "현 정부 첫 예산안인 2023년 예산안에서 건전재정 기조로 전면 전환해 올해 예산안은 그 기조를 견지했고, 내년 예산안에서는 이를 확립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내년 예산안 편성 지침에서도 '사업타당성 전면 재점검'과 '재량지출 10% 이상 감축' 등 '강력한 지출구조조정'이 강조됐다.
정부는 건전재정 기조를 확립하면서도 저소득층 생계 지원을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등 '두터운 약자복지'는 계속해서 재정투자의 중점에 두겠다는 계획이다.
각 부처는 이날 확정된 2025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을 기반으로 오는 5월 말까지 내년도 예산요구안을 마련해 기획재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기재부는 각 부처 예산요구안을 토대로 6~8월 중 관계부처 및 지자체 협의, 국민 의견 수렴 등을 거쳐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편성해 9월 2일까지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2023~2027년 국가재정운영계획'에서 기재부는 내년 재정지출 규모를 올해 656조 9천억 원(정부 예산안 기준) 대비 4.2% 늘어난 684조 4천억 원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