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 스포일러 주의
'훔쳐보기'라는 건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 등 영화 역시 이러한 욕망을 자주 다루고 있다. '그녀가 죽었다'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대가 만들어 낸 관찰의 욕망과 관찰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스릴러의 형태로 빚어내 현대 사회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남의 삶을 훔쳐보는 취미를 지닌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는 편의점 소시지를 먹으며 비건 샐러드 사진을 포스팅하는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에게 흥미를 느끼고 관찰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한소라의 집까지 드나들던 구정태는 어느 날, 한소라가 소파에 죽은 채 늘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그가 한소라 집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협박을 시작하고, 사건을 맡은 강력반 형사 오영주(이엘)의 수사망이 그를 향해 좁혀온다. 스스로 범인을 찾아야 하는 구정태는 한소라의 SNS를 통해 주변 인물들을 뒤지며 진범을 찾아 나선다.
영화 '치외법권' '인천상륙작전' '덕구' 등 다양한 작품에서 각색과 스크립터를 맡으며 실력을 자랑했던 김세휘 감독의 첫 연출작 '그녀가 죽었다'는 지금 우리 시대, 현대 관객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인 SNS를 스크린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훔쳐보기가 취미인 공인중개사 구정태와 보여주기가 일상인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라는 두 인물을 주축으로 진행되는 '그녀가 죽었다'는 여러 형태의 관찰이 중첩되는 형태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구정태가 한소라를, 한소라가 구정태를, 그런 둘을 오영주 형사가 관찰하고 이 모든 상황의 최종 관찰자는 바로 '관객'이 된다. 이는 영화 내내 이야기하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자'의 욕망에 관한 질문과 이어진다.
영화는 CCTV를 둘러싼 논쟁적인 지점, 즉 치안과 인권 침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하는 뉴스 보도로 시작한다. CCTV 역시 인간의 양가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매개체고, 이러한 속성은 이후 SNS라는 현대 사회의 또 다른 매개체로 이어진다. 그리고 구정태와 한소라라는 인물과 그들의 행각은 SNS의 두 가지 측면,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다는 두 가지 특성에서 발생하는 SNS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구정태는 남의 집을 훔쳐보고, 훔쳐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리품을 챙겨 자신만의 창고에 모아둔다. 자신의 직업적인 특성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이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그냥 보기만 한 것"이라거나 '나쁜 짓'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오히려 관음증을 '관찰'로 표현하며 죄의식을 갖지 못하는 인물인 구정태의 시점과 그의 내레이션으로 진행한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자신의 범죄를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물인 만큼, 구정태의 내레이션은 밝고 유쾌하다. 구정태와 행위와 반대되는 발랄한 톤에 관객들은 구정태를 오히려 더 불쾌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함은 결국 '그녀가 죽었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관찰자 구정태와 달리 한소라는 보여주고 싶어 하는 행위자, 즉 관찰의 대상자다. 타인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한소라는 자기 자신을 감춘 채 타인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구정태와 한소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진짜 모습을 감추고 거짓으로 자신을 둘러싼 채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그리고 진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구정태와 거짓을 들키지 않고 싶은 한소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두 사람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과정에서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자'가 바뀌는 등 여러 가지 측면의 문제와 생각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SNS를 통한 범죄피의자 신상 공개, CCTV의 필요성과 문제점, 익명의 힘을 빌려 타인을 쉽게 비난하는 것 등 말이다. 어느 하나 쉽게 단언할 수 없는 게 우리 역시 어느새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구정태와 한소라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내면에는 저마다의 질문이 자리 잡게 된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그녀가 죽었다'가 던지는 질문 중 흥미로운 질문은 바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인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느샌가 가해자인 구정태가 피해자로 변한 상황에 놓이고, 범죄의 경중과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봐야 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간다.
관객들은 각 상황에서의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피해자에게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몰입조차 불편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온전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위치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구정태라는 인물이 가진 복잡한 위치는 여러 모로 혼란과 불편함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처럼 '그녀가 죽었다'는 관객을 보다 적극적인 관찰자로 만들면서 영화 안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혼란스럽고 불편한 감정은 어느새 관객들에게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놓쳤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질문하게 한다.
영화 속 화두, 즉 CCTV와 SNS를 어떻게 볼 것이고,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는 사람의 '선택'에 달렸다. 다시 말해 내재된 본성과 욕망의 어느 방향을 따를 것이냐에 달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죽었다'의 화두는 스릴러라는 장르의 본질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구정태와 한소라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고민과 질문 사이에서 감독은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하게 경계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구정태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고, 오영주 형사(이엘)의 말을 통해 구정태가 '피해자'가 아니었음을 못 박는다. CCTV와 SNS의 시대, 다시 말해 모두가 관찰자이자 관찰의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누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구정태의 결말, 오영주 형사의 마지막 대사를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다.
신혜선과 변요한은 양가적인 측면은 물론 큰 폭의 감정을 오가는 캐릭터를 유려하게 표현해 내며 관객들이 스크린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엘 역시 관객들의 우려 지점을 감독을 대신해 전달하는 중요한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한다. 세 배우 모두 이토록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만드는 호연을 보여줬다.
김세휘 감독은 첫 연출 작품에서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적절한 선을 찾아가며 인간에 관한 흥미로운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현재의 문제를 스크린으로 가져오며 지금의 시대를 돌아보고, 그러한 시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각자 어떤 질문을 가질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감독이 과연 다음 작품에서는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질문을 던질지 궁금해진다.
102분 상영, 5월 15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그녀가 죽었다' 메인 포스터. ㈜콘텐츠지오, ㈜아티스트스튜디오, ㈜무빙픽쳐스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