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환 기자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 사용에 대한 압박이 커지고 있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국내 재생에너지 수급 난항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뒤늦게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책을 내놓긴 했지만 주요 국들에 비해서 로드맵 발표가 늦은 감이 있는만큼 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라도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애플, ASML 이어 MS도 '넷제로' 촉구…미달성시 불이익 전망
1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시가총액 1위의 빅테크
MS(마이크로소프트)는 주요 공급업체들에게 2030년까지 '넷제로(탄소 순배출량 0)'을 달성하라고 요구할 방침이다.
WSJ(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멜라니 나카가와 MS CSO(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는 "대량 공급 기업들에게 2030년까지 100% 무탄소 전기를 사용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기준을 따르지 않았을 때 공급망에서 퇴출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도체 첨단 공정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제조 업체인
ASML도 최근 공개한 연간 보고서를 통해 "2040년까지 고객 업체를 포함한 모든 생산·유통 과정에서 넷제로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넷제로를 달성하지 못한 고객사에 대해 ASML이 어떤 불이익을 줄지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ASML가 이런 고객사에 대한 납품을 후순위로 둘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대표적인 고객사 중 하나인
애플도 "10년 내로 제품 공급망 전반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공급망은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만들고 고객에게 전달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공급망 전반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것은 이들 회사에 납품하는 협력사들에 대해서도 탄소중립도 요구하겠다는 것인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에 대한 탄소 감축 압박이 더 커진다는 의미다.
삼성·SK "해외선 100% 재생에너지…국내선 쓸 에너지가 없다"
태양광 발전소. 연합뉴스 반도체 공급망의 이런 움직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탄소 배출 저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25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것을 선언하는 'RE100'에 지난 2020년 가입했고, 삼성전자도 2년 뒤인 2022년 여기에 합류했다.
두 회사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미국과 중국, 유럽 사업장에서는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율이 턱없이 낮다. 2022년 기준 재생에너지 전환율은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23%, SK하이닉스는 20% 등 낮은 수준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국내 사업장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미미한 것은 사용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24시간 공장을 돌려야 하는 반도체 산업은 그 특성 상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 특히 첨단 공정일수록 전기가 더 많이 요구된다. 하지만 영국의 글로벌 싱크탱크 '엠버'가 지난해 전 세계 전체 발전량 대비 재생에너지(태양광, 풍력, 수력, 바이오에너지 등) 발전량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율은 9%로 세계 평균(30.3%)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2022년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5만406GWh(기가와트시)로 전체 발전량(62만6448GWh)의 8.1%에 불과했다. 2022년 삼성전자는 2만1731GWh, SK하이닉스는 1만41GWh의 전력을 사용했는데
한 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 중 63% 이상을 두 업체가 모두 사용해야 반도체 공급망에서 요구하는 넛제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RE100 달성 목표를 2050년에서 2040년으로 10년 앞당긴 상황이다. TSMC는 지난 2020년 덴마크 풍력 기업 오스테드와 세계 최대 규모 해상풍력 전력 구매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지난해 대만 기업 'ARK 에너지'와 2만GWh에 달하는 태양광 전력을 20년 동안 공급받기로 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산하 '탄소중립 산업정책연구소(Net Zero Industrial Policy Lab)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높아지는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대만과 일본에 뒤쳐졌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대만, 정부차원서 재생에너지 지원…정부, 뒤늦게 재생에너지 정책 발표
연합뉴스TSMC가 재생에너지 활용 면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만 정부의 대대적인 재생에너지 육성책 등이 있다. 대만은 전체 전력 생산의 80% 이상을 석탄 등 화석연료를 이용한 화력발전이 담당하고 있는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전력생산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2년 전 재생에너지 비율을 2050년 최대 60%까지 높이는 '2050 탄소 중립 로드맵'을 발표하며 대대적인 재생에너지 육성에 나선 상태다. 재생에너지개발법을 통해 해상풍력을 통해 생산된 전력을 20년간 고정 가격으로 구매하게 하면서 수익성을 보장해줘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 기업인 오스테드 등 많은 재생에너지 기업의 투자를 유지했다.
이런 정책은 TSMC의 RE100 조기 달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 16일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및 공급망 강화 전략'을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오는 2035년까지 100GW 이상의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제도 보완 목소리는 여전하다. 정부의 이번 대책에서 업계가 꾸준히 요구해온 재생에너지 원에 대한 세금 공제 제도는 빠졌다.
미국 정부는 IRA(인플레이션감축법)를 통해 ITC(투자세액공제) 등 막대한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주요국들은 재생에너지 전환과 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공격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기업들은 신재생에너지 설비 투자에 대해 30%의 세액 공제를 지원 받을 수 있다. 반면 국내는 재생에너지 관련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는 따로 없고 기본공제율이 적용되는데 대기업은
투자 금액의 1%만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재생에너지 조달이 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중요 변수로 떠올랐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에서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해상풍력발전특별법은 모두 3건인데 여야는 특별법에 대한 이견을 좁히고 이를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지만 이번 국회 회기가 보름도 남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통과가 불투명하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달성을 위해서는 송전망 확충 문제도 풀어야할 중요 과제로 꼽힌다. 재생에너지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전력망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펀드사인 블랙록은 전남 신안군 일대에 손자회사인 크레도오프쇼어를 통해 10조원을 투입해 국내에 초대형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불허했다. 정부는 크레도오프쇼어가 제출한 일부 증빙 서류가 재무 능력 입증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업계에서는 현재 해당 지역의 송전망 등 전력계통이 포화 상태에 달해 사업이 완료되더라도 전력 계통 연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무총리실에 '전력망확충위원회'를 만들고 정부 주도 입지 선정과 사업 시행에서 민간의 참여 범위를 넓히는 내용을 담은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회 소관 법안 소위 문턱도 넘지 못한채 자동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 유승훈 학장은 "계통 연결 문제로 건설이 마무리 됐음에도 불구하고 놀고 있는 발전소들도 적지 않다"며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위해서는 전력망 확충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