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 사자'로 불리던 바람이 모습. 청주동물원 제공널따란 초원이 아닌 가로 14m, 세로 6m의 좁고 열악한, 볕조차 들지 않는 실내 시멘트 우리. 그 안에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채 홀로 우리에서 지내던 사자. 이른바 '갈비 사자'로 불렸던 바람이는 청주동물원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다.
2004년생 바람이의 새 보금자리 청주동물원은 지난 5월 국내 첫 거점동물원으로 지정됐다. '거점동물원'이란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동물원 허가제와 함께 새롭게 도입된 지정 제도다.
거점동물원으로서 청주동물원의 역할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전시'보다 '복지'에 가깝다. 토종 동물을 보존하고, 야생동물을 구조해 바람이처럼 새 삶과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일종의 '생츄어리'(야생동물 생츄어리·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을 위한 보호 시설)인 셈이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제공 생츄어리는 왜 필요할까?
지난 2015년 2월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사육사가 사자들이 내실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모른 채 방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참변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 이후 사자를 두고 안락사 의견이 제시됐으나 결국 내실에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갈 곳 없는 두 사자 다크와 해리 그리고 둘 사이 태어난 새끼 해롱이를 받아준 건 미국 야생동물 보호소 야생동물 생츄어리(TWAS·The Wild Animal Sanctuary)다.
다크와 해리 외에도 여러 이유로 내실에 격리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동물을 비롯해 인간에게 사육당했던 곰, 자연에서 부상을 입은 야생동물 등이 갈 곳이 없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는 생츄어리(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을 위한 보호 시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구조된 야생동물들이 생활하는 미국 야생동물 생추어리를 비롯해 중국·베트남·라오스에는 사육 곰 생추어리가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2018년부터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가 사육 곰을 구조하고 곰 생츄어리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는 농장주의 사육 포기로 갈 곳이 없어진 사육 곰 18마리를 구조했고, 현재 13마리 곰을 돌보고 있다.
베트남 '애니멀스 아시아'(Animals Asia) 생츄어리 모습.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제공구조된 곰 외에 아직 18개 사육 곰 농장에 280여 마리의 사육 곰이 존재한다. 오는 2026년 1월 1일부터 개인의 곰 사육과 웅담 채취, 웅담 판매가 금지되는데, 정부가 충남 서천과 전남 구례에 짓고 있는 곰 보호 시설에 수용할 수 있는 곰은 120마리에 불과하다.
이처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사육당한 곰들이 인간에 의해 갈 곳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가운데 곰들이 남은 삶을 보낼 보금자리 마련에 나선 것이다. 곰의 수명이 30년이라고 한다면 20년이 지나고 사육 곰은 모두 사라진다. 그 후에는 동물원과 수족관, 개인이 전시용으로 기르는 동물을 보호하는 시설로 생츄어리 역할을 하려고 계획 중이다.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최태규 활동가(수의사)는 생츄어리의 의미를 최소한의 책임이자 반성과 성찰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생츄어리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동물을 다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냥 동물들을 죽이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들을 위해 뭔가 해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최 활동가는 "야생의 동물을 함부로 사육 상태로 데려왔을 때는 여러 문제와 사회적 비용이 생긴다. 사육 곰처럼 야생동물을 키우고 이용한다면 또 어떤 비용을 치를지 모른다"라며 "생츄어리가 반성하고 성찰하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청주동물원 수달사에서 수달이 물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있다. 환경부 공동취재단 제공 동물원은 생츄어리가 될 수 있을까?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가 건립을 준비 중이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단 한 곳의 생츄어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주동물원이 거점동물원으로서 일종의 '생츄어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 활동가는 "밝게 볼 수 있는 건 국내 동물원 다수가 공영동물원이다. 이윤을 내는 산업시설이 아니라 기존 오락과 휴양을 위해 동물을 가둬놨던 곳이 보다 윤리적인 기관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며 "그런 것들을 고려했을 때 청주동물원이 어떤 방면에선 생츄어리라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1호 거점동물원인 청주동물원에는 바람이를 포함한 사자, 호랑이, 수달 등 68종 295마리가 생활하고 있다. 다른 동물원과 비교해 마릿수가 많지 않은 대신 동물들이 생활하는 데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거점동물원으로 지정받으면서 청주동물원은 △동물원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홍보 △동물 질병 및 안전관리 지원 △종 보전·증식 과정 운영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국가로부터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다.
김정호 청주동물원 진료사육팀장은 "오늘(7일)도 구조된 산양과 수의사 없이 수달을 키우는 기관에서 온 수달이 (청주동물원에) 입원 비슷한 형식으로 와 있다. 이처럼 청주동물원은 소외된 야생동물들이 최소한의 진료와 치료를 받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동물이 내실과 방사장을 언제든 오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놨다. 이에 관람객들이 동물을 '관람'할 수 없는 일도 생기지만, 동물 입장에서는 보다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생활할 수 있다. 특히 청주동물원은 시민들에게 동물들의 건강 검진 과정을 공개할 예정이다.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제공새로운 생츄어리의 건립이 어렵다면 기존에 있는 동물원들이 생츄어리 역할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 역시 대안 중 하나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민들의 동물원에 대한 인식 역시 '전시' '관람'에서 '보호' '복지'로 바뀌는 추세라는 점은 이러한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가 지난해 발간한 '동물복지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동물원이 앞으로 변화해야 하는 방향성에 대해 사람들은 △생물다양성 보전 교육 장소(27.3%) △야생에서 살 수 없는 동물 보호소 역할(25.6%) △야생동물 보전・연구 및 서식지 보호 활동(23.9%) 등 야생동물의 보호소 역할 등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김정호 팀장은 "생츄어리가 아예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땅에 새롭게 짓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공영동물원들이 생츄어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라며 "해외에서 동물을 구입해 전시 목적으로 가져다 놓는 걸 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사육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동물을 데리고 온다면 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생츄어리를 만들어 갈 방법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인 의식이 바뀜에 따라서 동물원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동기로 삼으면 될 거 같다"라며 "우리나라는 유독 동물원도 야생동물구조센터도 공공성이 있는 곳이 많다. 있는 시설을 바꾸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편에서 계속>